제4장
이시연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정도는 혼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만약 회사에서 진짜 너무한다 싶으면 당장 삼촌한테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할게요. 그때 가서 제대로 혼쭐 내주세요. 얼른 가서 일 봐요. 이만 갈게요.”
장난기 가득한 그녀 때문에 육성재는 실소를 터뜨렸다.
이내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하긴, 육씨 가문의 막둥이가 온실 속의 화초처럼 물러터질리 있겠는가?
회사에 도착하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상사 때문에 김정우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뜬금없는 질문을 받을 줄은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김 비서, 나 잘생겼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한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상계 외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육성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정해?”
‘그럴 리가.’
“때로는 다정할 때도...”
곧이어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김정우는 말문이 막힌 나머지 속으로 투덜거렸다.
‘누가 여자만 변덕스럽다고 했는가!’
...
이시연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부서 사람들이 강이준과 그녀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생각보다 일이 점점 커졌다.
“이시연이 진짜 강이준 선배와 싸웠대요?”
“네. 강 배우님 소속팀에 소문이 파다하대요. 지금 모든 업무가 중단된 상태라고 하던데.”
“대체 무슨 생각이죠? 강 배우님은 아직 젊고 잠재력도 있잖아요. 오로지 본인의 노력으로 무명에서 정상까지 이른 이상 앞으로 더 큰 업적을 남길 게 뻔하죠. 더욱이 이시연을 잘 챙겨주기로 소문 나지 않았어요? 만약 저라면 절대로 얼굴 붉히는 일 없이 매일 잘되라고 기도했을 거예요.”
누군가 비아냥거렸다.
“오늘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빌붙을 만한 다른 쩐주를 찾았나 봐요. 얼굴이 예뻐서 좋긴 하네요. 마음만 먹으면 남자를 유혹할 수 있으니.”
이시연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오로지 본인의 노력이라... 그렇다면 강이준 몰래 육씨 가문을 팔아서 얻어낸 자원은 대체 뭐란 말인가?
어차피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기에 이제 관계를 정리하려고 마음을 먹은 이상 이미 지나간 일을 굳이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었다.
이시연은 태연한 얼굴로 코너를 돌아 사람들의 앞에 나타났다.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곁눈질로 쳐다보니 마지막으로 말은 보탠 여자는 최근에 뜨고 있는 신인이었다.
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저랑 비교하면 외모가 뒤지긴 하네요.”
그리고 유유히 자리를 뜨자 여자들은 한순간에 발칵 뒤집혔다.
“의지할 곳조차 없는 고아 주제에, 밑바닥 하층민이 대체 무슨 배짱으로 도도한 척하는 거지? 반반한 얼굴만 믿고 몸을 팔고 다니는 건 아닌지 몰라.”
이시연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비서인 하민지가 쪼르르 달려왔다.
“시연 언니, 영화 메이킹 필름은 제가 담당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에요. 제발 언니를 복귀시켜 달라고 강 배우님한테 사정해볼게요!”
이시연은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어차피 강이준 소속팀에서 빠지기로 마음먹었어.”
연예인 소속팀은 소속사와 별개로 아티스트가 직접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강이준은 회사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을뿐더러 지분도 일부 보유했기에 공식적으로 소속팀이 따로 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상 회사에서 모든 일을 총괄적으로 관리했다.
“네? 일단 진정하시고, 언니는 강 배우님을...”
그제야 말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언니가 관두는 거 강 배우님도 동의하셨어요?”
이시연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개나 소나 그녀를 강이준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하는 거지?
“강이준이 뭐라고 허락까지 받아야 해?”
이때, 문 앞에 나타난 강이준은 안색이 어제보다 더 싸늘했다.
“집에 가서 생각 좀 정리하라고 했잖아. 그 결과가 관두겠다는 거야?”
이시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왼쪽 손목을 힐끔거렸다.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그동안 연인이자 전우로서 강이준과 함께 걸어왔다.
분명 둘도 없는 사이였지만 어제부터 처음 만난 사이처럼 느껴졌다.
눈앞의 강이준이 너무 낯설었다.
하민지는 일촉즉발의 두 남녀를 바라보며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
강이준이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가.”
“시연 언니...”
하민지의 표정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시연이 입을 열었다.
“먼저 나가 있어.”
문이 닫히자 처음 보는 그녀의 눈빛에 강이준은 흠칫 놀랐다.
시선이 점차 아래로 향하면서 매혹적인 빨간 입술에 멈췄다.
뛰어난 미모와 맑은 눈동자는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풍겼다.
성격이 잘 맞는 것을 제외하고 여태껏 이시연에게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녀의 외모였다.
이내 한층 누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시연아, 이제 그만 화 풀어. 아라는 단지 여동생에 불과하다고 대체 몇 번을 설명해야겠어? 며칠 뒤면 다시 촬영 현장에 가야 되어서 고집 꺾고 순순히 시인하면 없던 일로 해줄게.”
이렇게 황당할 수가!
“강이준, 날 설득할 시간에 차라리 장아라와 더욱 돈독한 사이로 만드는 데 신경 쓰시지?”
지지 않고 받아치는 그녀를 보자 강이준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화를 터뜨렸다.
“이시연, 똑똑히 들어. 물론 결백하다고 맹세하지만 설령 바람을 피운다고 한들 여자친구로서 당연히 이해해야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기까지 매일 얼마나 많은 유혹에 직면했는지 알아? 가끔 선을 넘는 일이 있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널 대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런데 대체 뭐가 불만이야?”
그녀는 충격받은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뻔뻔스러운 말을 어찌 태연자약하게 할 수 있단 말이지?
덕분에 훨씬 심각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다는 건 둘 사이가 이미 그녀의 예상보다 더욱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대체 뭘 위해서 고집을 부리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연예계는 원래 강약약강이잖아. 우리가 대판 싸워봤자 과연 네 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나 없이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래?”
이시연은 믿기지 않은 듯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리고 연신 심호흡하며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하지만 가방에서 사직서를 꺼내는 순간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내 입안마저 씁쓸하게 느껴졌다.
“만약 회사에서 다른 소속팀으로 옮겨주지 않으면 사직서를 제출할 거야. 앞으로 우리는 남남이 될 테니까.”
“어디서 감히!”
그는 번쩍 들어 올린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
‘이런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순간, 손찌검까지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강이준은 인내심을 발휘해 다시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
이때, 마침 서준태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통화를 이어갈수록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강 배우님, 서 대표님께서 이시연 씨를 찾으세요.”
강이준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어이없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시연, 너한테 이런 시시콜콜한 일로 회사 부대표까지 나서게 하는 능력이 있는 줄 몰랐네?”
한편, 어리둥절한 건 서준태도 매한가지였다.
이시연과 강이준의 관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중에 회사 임원이 포함되었다.
그래서 부서 이동을 요구했을 때 딱히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연인의 사랑싸움에 불과한데 굳이 강이준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지만 이엘 그룹의 육성재 대표가 유정 엔터테인먼트 대표에게 연락이 와서 이시연의 요구를 반드시 충족시켜 달라고 부탁할 줄은 몰랐다.
유정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시연을 위해 무려 이엘 그룹의 육성재가 직접 연락하다니?
결국 무시무시한 인맥 관계를 알아차린 임원들은 하나같이 몸을 사렸고 자연스럽게 가장 지위가 낮은 서준태에게 떠넘겼다.
서준태는 어이가 없었고 마지못해 묵인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초조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저, 이시연 씨? 서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이시연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강이준을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순간, 손목이 덥석 붙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