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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나는 사랑에 눈이 먼 인간이라고 북하시에서 소문났다. 아내인 임다은은 나의 목숨이자 내 삶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의 결혼을 인생의 오점이라고 여기고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렇게 우린 10년 동안 숨 막히는 결혼 생활을 했다. 남편이라는 신분을 지키기 위해 자존심 따윈 버린 지 오래였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하루가 멀다 하게 남자를 만난 것도 모자라 안방 침대에서 그들과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이런 지옥 같은 삶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뇌종양 말기 판정을 받았고 의사는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얘기했다. 진단서를 보니 죽는다는 게 실감이 나면서도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결심했다. 임다은과 이혼하고 남은 3개월의 시간을 즐기기로. ... 나는 텅 빈 병원 복도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시한부라는 생각을 하니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끝내 넋을 잃은 채로 별장에 돌아왔다. 웬일로 임다은이 집에 있었다. 안방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는 바늘처럼 내 심장을 쿡쿡 질렀고 그 소리가 커질수록 점점 숨이 막혀왔다. 애써 진정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런 치욕스러운 상황을 겪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도 불쌍했다. 결국 잠깐 망설이다가 방문을 두드렸다. 예전이라면 절대 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같은 성격인 임다은은 이런 타이밍에 방해받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나 몸이 만족하지 못했다면 온갖 성질을 부리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는 스타일이다. 어쩌면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열심히 모은 골동품마저 산산조각 낼 것이다. 그동안 애쓴 나 자신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침대에서 그녀를 기쁘게 해주지 못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매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할 수 있는 건 주먹을 불끈 쥔 채 화를 삼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마침내 안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왜? 들으니까 흥분돼?” “여자 하나 불러줄까?” 문이 열리자 헝클어진 머리로 임다은이 나타났다.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었고 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은 아직 홍조가 가시지 않았다. 가녀린 몸으로 문을 막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혐오감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눈빛은 한없이 싸늘했다. “할 말이 있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혐오가 담긴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심장이 미어졌다. 괴로움에 목이 메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말했다. “급한 일 아니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확고한 내 눈빛을 본 탓인지 임다은은 이를 악물고 협박하고선 잠옷을 꽉 조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우리 이혼하자.” “이혼 합의서를 준비했으니까 넌 사인만 하면 돼.” 마지못해 소파에 앉아 있는 임다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씁쓸함을 꾹 참고 이혼 합의서를 내밀었다. 그러나 임다은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언짢은 티를 팍팍 냈다. “배승호, 넌 어쩌면 매번 한결같냐? 이제는 이러는 게 지루하지도 않아?” “이번에는 진심이야. 난 이미 사인했으니까 너만 하면 우린 바로 이혼할 수 있어.” 임다은의 싸늘함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나는 시선을 피하며 애써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임다은은 내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고선 한참 만에야 합의서를 받았다. “무슨 뜻이야? 재산 분할을 안 해도 된다는 거야?” 서류를 훑어보던 임다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응. 필요 없어. 빈손으로 나갈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저축한 돈은 많지 않았지만 앞으로 3개월을 걱정 없이 보내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챙겨야 할 가족이 없었기에 이대로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 그러니 임다은의 재산은 한 푼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임다은은 사인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짜증을 내며 합의서를 내던졌다.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맨몸으로 쫓겨났다고 소문나면 사람들이 널 불쌍하게 생각할 것 같아? 아니면 날 욕 먹게 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야?” “이혼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데 이 합의서로는 안 돼. 변호사 시켜서 다시 써. 별장이랑 차는 네가 가져. 그리고 위자료도 20억 챙겨줄 테니까 잔머리 굴리지 마. 역겨워.” 임다은은 나를 한번 노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고 싶었지만 손을 뻗은 순간 극심한 두통이 밀려와 머리가 어지러웠다. “불쌍한척하려고 꾀병까지 부리는 거야?” “배승호, 잘 들어. 네가 지금 당장 여기서 죽는다 해도 난 눈길 한번 주지 않을 거야.” 의식을 잃기 전 귓가에 임다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혐오감이 가득 담긴 그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가웠지만 미세한 당황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주변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떴지만 임다은은 보이지 않았다. 반면 그곳에는 김현호가 의자에 앉아 앙상한 손가락으로 서투르게 사과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김현호는 3년 전에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당시 그는 막 스무 살이었는데 여심을 저격하는 훈훈한 얼굴과 달리 180cm의 키에 탄탄한 몸매를 갖고 있어 반전 매력이 돋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데뷔하자마자 수많은 팬을 확보하며 임다은의 눈도장을 찍었다. 임다은은 그에게 고급 스포츠카와 별장 등등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회사 지분까지 떼어주며 당당하게 이사회에 참석할 명문을 만들어줬다. 물론 사적인 시간까지 그에게 주었다. 두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회사와 호텔은 물론 내가 살고 있는 별장까지 그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임다은의 총애를 등에 업은 김현호는 어느새 세상 물정 모르던 강아지에서 욕심 가득한 늑대로 변했다. 자연스레 김현호는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냈고 반드시 내 자리를 꿰차 정정당당하게 임다은의 남편이 되겠다며 시도 때도 없이 얘기했다. 한때 김현호에게 푹 빠졌던 임다은은 매일 이혼을 언급했고 기자들 앞에서까지 반드시 김현호와 함께 할 거라며 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끈질기게 매달린 나 때문에 두 사람은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니 김현호는 늘 나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형, 깼어요?” “괜찮아요?” “아참, 뇌종양 말기라는 걸 깜빡했네요. 괜찮을 리가 없지...” 김현호는 걱정하는 척하다가도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며 나를 놀렸고 두 눈에는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다. 따질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갑자기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임다은이 날 만나러 온 건가?’ ‘시한부 판정 받은 걸 알고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왠지 모를 기대감이 마음 가득 채웠던 괴로움을 쓸어내렸으나 모든 건 내 망상에 불과했다. 눈을 뜬 순간 얼음장같이 차가운 그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누가 보면 죽을병인 줄 알겠네. 감기 걸린 거로 이렇게 오바할 일이야?” “이혼하고 싶다며? 얼른 사인해.” “사인하고 당장 짐 싸서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임다은은 혐오감을 드러내며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째려봤다. 아픈 사람을 바라보는 게 아닌 더러운 물건 취급하는 그 눈빛이 날 아프게 했다. “누나, 화내지 마요.” “형도 누나를 너무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죠. 누나랑 같이 있고 싶어서 꾀병 부리는 게 얼마나 불쌍해요.” 김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임다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날 위하는 척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부러 임다은의 성질을 긁고 있었다. 임다은은 한성 그룹을 등에 업고 이엘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그 이후 한성 그룹은 점점 몰락하게 되었고 임다은은 누군가가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을 언급할 때마다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니 김현호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나 다름없다. 아니나 다를까 임다은은 부잣집 아가씨의 체면마저 버린 채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사랑? 쟤는 그럴 자격조차 없어.” “당장 사인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돈 받고 내 눈앞에서 꺼져. 계속 질척거리면 더 이상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임다은은 가방을 들고 돌아서서 나갔다. 김현호도 재빨리 걸음을 옮겼고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롱 섞인 눈빛을 보냈다. 동시에 입으로는 뭔가를 속삭였다. “빨리 죽어요. 불쌍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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