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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원한은 맺었고 더 나은 뒷배를 위하여

“수지야.” 유정숙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하씨 가문에는 좋은 인간 따위 없어. 다들 복수심에 불타올라서 널 모질게 괴롭힐 거야. 그러니까 얼른 이 할미 말 들으렴.” “내가 이렇게 빌게.” “아무도 우리 수지를 지켜주지 않으면 나도 요양원에서 안심하고 지낼 수가 없어. 매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잘 거야. 얼마 못 가 우울증으로 죽어버리겠지.” 유정숙은 가여운 표정으로 수지에게 애원했다. 빨개진 눈시울이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비록 수지가 털어놓지 않았지만 유정숙은 다 알고 있다. 하씨 가문과 이미 원한을 맺었고 아무도 그녀를 지켜주는 자가 없기에 하동국 일행이 틀림없이 수지에게 복수할 것이다. 유정숙은 정성껏 키워온 착한 손녀가 그 어떤 불행도 겪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이젠 정신 상태가 그다지 안 좋아서 이렇게나마 온전히 얘기할 수 있을 때 수지를 위해 좋은 미래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수지야, 이 할미가 우울증으로 죽길 바라는 건 아니지? 그럼 난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거야!” “흑흑...” 유정숙은 드디어 울음을 터트렸고 수지도 마지못해 한참 달래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래도 어르신은 눈물을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수지는 결국 양 할아버지의 집에 가서 지내라는 할머니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대답하자마자 할머니가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을 뚝 그쳤다. 이어서 휴대폰을 꺼내고 돋보기를 끼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때 병실 문 앞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임수빈이 전화를 받으며 병실로 들어왔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공손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임수빈이라고 합니다. 2분 전에 저희 어르신 전화를 받고 할머님 손녀딸을 모시고 가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수지 씨.” “그쪽이 바로 할아버지가 보내신 분이라고요?” 수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2분 전에 전화를 받고 고작 2분 만에 할머니 병실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슈퍼맨도 당하지 못할 스피드였다. 한편 임수빈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네. 실은 오늘 저희 대표님과 함께 할머님을 뵈러 왔는데 대표님이 급한 일로 먼저 자리를 떠나셨거든요. 제가 대신 인사드리러 왔다가 마침 어르신 전화를 받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우연의 일치인 거죠.” 임수빈은 해명하면서 수지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전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어 대충 지켜볼 뿐이었지만 지금처럼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쁜 외모를 지녔다. 주먹만 한 얼굴에 백옥같은 새하얀 피부,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도도한 분위기, 오뚝한 콧날과 앙다문 입술은 매력적이면서도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옷차림도 아주 수수한 재킷과 스웨트팬츠였는데 그 와중에 날씬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머리를 묶어 올린 깔끔한 헤어스타일은 젊고 예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다만 이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함과 소외감이 전해졌고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니, 하나쯤은 신경 쓰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유정숙 어르신이다. 수지는 유정숙을 바라볼 때 눈빛이 저절로 부드러워지고 말투도 한결 자상해진다. 임수빈은 또다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김은경을 쳐다봤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하동국과 김은경 부부는 최근 2년 사이에 뒤늦게 오성 갑부로 등극한 부부인데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유정숙에게 무릎까지 꿇고 사과하는 걸까? 수지가 아주 대단한 인물이란 것밖에 더는 해명할 길이 없었다. 임수빈은 시선을 거두고 챙겨온 선물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할머니, 수지 씨는 그럼 지금 모셔갈까요 아니면 좀 더 있다가 모셔갈까요?” “잠깐, 잠깐만 기다려.” 유정숙은 휴대폰을 꺼내서 박선재와의 채팅 기록을 열고 그 위의 사진이 임수빈 본인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방금 건 전화도 지금 이 젊은이가 받았고 하는 말도 전부 일치했다. 유정숙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비록 박서진이 못 와서 매우 유감스럽지만 수지를 박씨 가문에 들여보낼 수만 있다면 앞으로 박서진과 함께 지낼 시간이 충분할 것이다. “수지야, 나 이미 어머님께 사과드렸으니 일어나도 되겠지?” 김은경은 줄곧 울화를 참고 있었다. 임수빈까지 들어온 마당에 그녀는 수지와 유정숙을 향한 불만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수지는 유정숙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할머니, 김은경 씨 용서해주실 거예요?” 이에 유정숙은 김은경과 하동국을 번갈아 보다가 잠시 고민한 후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용서하지.” “그렇지만 이제 더는 이 인간들 보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내보내.” “네.” 수지가 자상한 말투로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하동국 가족에게 말했다. “하동국 씨, 김은경 씨, 이제 그만 하윤아 데리고 여기서 나가주시죠.” “수지야, 전에 한 약속 잊지 마.” 하동국이 입을 열었다. 실은 수지가 녹음과 영상으로 그들더러 할머니께 사과하라고 협박했는데 이제 요구대로 했으니 수지도 그 영상과 녹음본을 삭제해야 한다. 이에 흔쾌히 동의하는 그녀였다. “네.” 그녀는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휴대폰을 꺼내서 녹음과 영상을 모조리 삭제했다. 하윤아와 김은경은 이제 그녀와 철저히 원한을 맺게 되었으니 절대 이대로 물러날 리가 없다. 녹음과 영상은 일찌감치 암호화된 메일함으로 동기화되었기에 지금 삭제한다고 해도 수지는 백업을 받아두고 있다. 만약 하씨 가문에서 유정숙에게 효도하고 더는 그녀를 귀찮게 굴지 않는다면 수지도 더는 이 집안과 등질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백업본도 평생 폭로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수지는 그 누구보다 하씨 가문의 수단을 잘 알기에 반드시 경계를 일으켜야 한다. 하동국과 김은경은 그녀가 삭제한 후 또다시 휴대폰을 뺏어와서 낱낱이 검사하고 나서야 되돌려주었다. “어머님께서 수지를 감싸고 도는 건 윤아를 친손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겠네요.” 김은경은 끝까지 내키지 않았지만 임수빈이 있다 보니 말을 가려서 해야만 했다. “다 나가.” “난 윤아라는 애 몰라.” 유정숙은 그런 김은경에게 고분고분할 리가 없다. 이 여자는 유정숙이 머리를 다친 이후로 아주 모질게 대했던 인간이다. 비록 이젠 6살 아이의 지능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바보가 됐거나 멍청한 건 아니다. 기억력 또한 아주 좋아서 많은 일을 새겨두고 있다. 김은경이 뭐라 더 말하려 할 때 하동국이 그녀와 하윤아를 이끌고 병실을 나섰다. “어머니가 수지를 감싸고 도는 한 오늘은 절대 얘기가 안 끝나.” 세 식구가 병실을 떠나고 나서야 하동국이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만 수지가 시시각각 어머니 옆에 있어 줄 순 없잖아. 어머니가 몇 해나 더 살겠어? 평생 수지를 지켜줄 순 없을 거야.” “지금 어머니 손에 지분 말고도 다른 걸 챙기고 있어. 교통사고를 당한 후 그 물건들을 어디에 뒀는지 생각나지 않을 뿐이야.” “일단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가 숨긴 액세서리들부터 윤아한테 주자고.” 이 말을 들은 김은경과 하윤아가 두 눈을 반짝이며 더는 수지와 유정숙을 신경 쓰지 않고 흔쾌히 요양원을 떠났다. ... 그들이 떠난 후 방안에는 수지와 유정숙, 임수빈 세 사람만 남게 됐다. 유정숙은 박선재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통화가 곧장 연결되고 박선재의 자애로운 얼굴과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숙아! 임 비서가 수지 데리러 갔지?” “우리 수지 얼굴 봐봐.” 유정숙은 얼른 휴대폰을 수지 앞에 갖다 댔다. “수지야, 할아버지께 인사드려.” 이에 수지는 금세 다소곳한 모습으로 돌아와 나긋한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그래, 반가워 수지야.” 박선재는 영상 속 예쁜 소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자 귀여운 모습에 마음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이토록 예쁘고 귀여운 아이가 하필이면 생뚱맞은 집으로 잘못 보내졌으니 마냥 속상할 따름이었다. 다만 하씨 가문은 오성 갑부 집안이라 충분히 키울 여력이 되겠는데 기어코 그녀를 집에서 내쫓아버렸다. 20년이나 키워온 딸인데 어찌 이토록 매정하게 내쫓을 수 있을까? 그 인간들은 야박해도 너무 야박할 따름이었다. 이제 수지는 할머니를 위해 하씨 가문과 철저히 등지게 되었다. 유정숙의 말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없다면 수지는 분명 하동국 가족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뼈도 추스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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