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할머니가 골라주신 손주 사윗감
유정숙은 잠시 침대 밑을 뒤지더니 상자 한 개를 꺼내왔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안으로 잠그고 나서야 보물 건네듯 수지 앞으로 상자를 내밀었다.
“얼른 먹어.”
상자 안에는 소금빵 몇 개가 들어있었다.
수지는 문득 눈시울이 빨개졌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디저트를 좋아했고 그중에서 소금빵이 최애였다. 이에 유정숙은 식단에 소금빵이 나올 때마다 하나씩 모아뒀다가 수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6살 아이의 지능으로 변했음에도 유정숙은 여전히 수지가 소금빵을 제일 좋아하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얼른 먹어, 수지야.”
할머니가 다그치자 수지는 머리를 끄덕이며 빵을 한입 물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숨겨뒀는지 식감도 변하고 빵이 살짝 눅눅해졌다.
그럼에도 수지는 망설임 없이 소금빵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그리고 여기 봐봐.”
유정숙은 신비로운 얼굴로 사진 한 장 꺼내더니 수지 앞에 건넸다. 사진 속에는 반듯한 정장 차림에 완벽한 외모를 지는 남자가 있었다.
“할미가 우리 수지를 위해서 골라준 손주 사윗감이야.”
“마음에 들어?”
“강현우 그 자식은 안돼. 너도 얼른 패스해버려.”
이 말을 들은 수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할머니, 나 당분간 남자친구 만날 생각 없어요.”
그녀는 오늘 하씨 가문에서 쫓겨난 일을 할머니께 말씀드리지 못했다.
할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오늘 이런 서러움을 당한 걸 말씀드리면 무슨 소란을 피울지 모른다.
그때 가서 하동국과 김은경은 또 수지가 하씨 가문을 떠나지 않으려고 일부러 유정숙을 찾아가 일러바친 거로 오해할 게 뻔하다.
다만 그녀가 말을 내뱉자마자 할머니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어느새 다 알아버린 것이다. 할머니는 분노와 속상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수지를 꼭 안아주며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 할미도 다 알아. 다들 너 싫다고 했지? 울지 마, 수지야. 할머니가 더 좋은 약혼자를 찾아줄게.”
“좀 있으면 올 거야.”
“자, 바로 사진 속 이 남자 말이야.”
수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사진을 볼 겨를도 없이 초조하게 되물었다.
“뭘 아신다는 거예요, 할머니?!”
유정숙은 입을 삐죽거리며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걔, 하윤아가 돌아와서 강현우까지 뺏어갔잖아. 괜찮아 수지야. 할미가 더 좋은 남편감으로 찾아줄게.”
“사진 봐봐. 얘가 바로 나랑 의남매 사이였던 오라버니의 손자 박서진이야. 잘생겼지 돈 많지, 강현우보다 백 배는 나아. 우리 수지 이런 남자랑 결혼해서 하윤아랑 강현우에게 제대로 복수해주면 돼.”
가장 중요한 것은 박서진이 그녀의 손녀딸을 지켜줄 수 있다는 점이다. 더는 수지가 하씨 가문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줄 수 있다.
하씨 가문의 한 가족 세 식구는 다들 양심도 없고 사악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이라 어려서부터 마음씨 착한 수지가 그 누구의 보호도 못 받는다면 분명 그 인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뼈도 추스르지 못할 것이다.
“이따가 서진이가 이리로 올 테니 수지 너 표현 잘해야 한다. 우리 수지는 예쁘고 성격도 좋아서 금세 서진이 마음을 홀릴 거야. 그러고 바로 결혼해서 박씨 가문 안방마님이 되는 거지.”
유정숙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박서진한테 시집갈 수만 있다면 하씨 가문이 다 뭐야? 강현우는 더 가당치도 않은 거고!”
“그때 되면 우리 수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를 걸!”
“나중에 서진이랑 결혼하고 하씨 가문에 찾아가서 보란 듯이 그 집 식구들 약 올려!”
수지는 멍하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지금 내가 모를 사이에 손주 사윗감까지 골라주셨단 거네?’
어르신은 박서진의 조각 같은 외모를 떠올릴 때마다 하동국 가족에 대한 불만도 조금씩 사그라져서 흥미진진하게 말을 이었다.
“서진이 진짜 돈 많아.”
...
그 시각 유정숙의 병실 문 앞에 훤칠한 체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눈썹과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훤칠한 몸매까지 더하니 아우라가 저절로 뿜어져 나왔다.
이 남자가 바로 유정숙이 말한 박서진 장본인이었다.
박서진은 오늘 할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요양원까지 찾아왔다. 오래전 의남매를 맺은 분이시자 지금 방안에 계시는 유정숙 어르신을 뵈러 온 것이다.
하지만 오자마자 이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전 약혼자에게 복수하려고 고작 사진 한 장으로 더 나은 남편감을 상의하고 있는 그녀, 그야말로 이기적이고 인생을 막사는 여자였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남의 집 손녀가 파혼했다고 내가 바로 이어받아야 하는 거야?’
‘게다가 이쁘고 성격도 좋아서 눈빛 한 방에 바로 마음을 홀린다고? 여자를 못 만난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궁해 보여?!’
박서진은 손에 든 선물 박스를 휴지통에 버리고는 자리를 떠나버렸다.
‘저렇게 허영심 많은 여자는 파혼당하는 게 마땅하지!’
그는 돌아가서 할아버지께 제대로 묻고 싶었다. 대체 왜 저런 할머니와 의남매를 맺으신 건지, 저런 분의 손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을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다.
박서진은 병원을 나선 후 휴대폰을 꺼내 할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할아버지, 그 할머님 뵙고 오라는 미션 저 못하겠으니 딴사람으로 보내세요!”
“지사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지금 바로 처리하러 가야 해요.”
“이놈의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해봐!”
박서진은 재빨리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전화기 너머로 울려 퍼지는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다 들은 후 그는 담담하게 통화를 마치고 차에 올라탔다.
“출발해, 임 비서.”
“네.”
임수빈이 차에 시동을 걸려고 할 때 박선재의 전화가 또다시 걸려왔다.
“대표님, 어르신 전화이십니다.”
“네가 받아.”
“네.”
그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네, 어르신, 저 수빈입니다.”
“수빈아! 서진이 저 녀석 내 말 안 듣고 요양원 안 갔지?!”
뒷좌석에 앉은 박서진은 안색이 확 어두워졌고 차 안에 순간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임수빈은 조심스럽게 박서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박서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도 어르신께 대답했다.
“네, 어르신, 다름이 아니라 대표님께서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떠나셨어요. 제가 여기 있으니 지금 바로 할머님 뵈러 갈게요.”
임수빈은 박서진 옆에서 수년간 일해온 수행비서이다. 이젠 대표님의 눈빛만 봐도 알아서 척척 대답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박선재가 건강이 안 좋다 보니 박서진은 거의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은 어르신과 의남매를 맺은 분을 뵈러 하늘 요양원에 찾아왔다. 그분은 바로 몇 년 전에 사고로 머리를 다쳐 줄곧 하늘 요양원에서 지내시는 하씨 가문 어르신 유정숙이다.
대표님은 선물 박스까지 들고 병실 문 앞에 도착했는데 노크하기도 전에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고 안색이 확 어두워지며 야유 섞인 미소를 날리고 서슴없이 선물 박스를 휴지통에 버렸다.
이건 박선재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니 절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현재로선 임수빈이 박서진을 대신해 유정숙을 뵈러 가면 대표님도 구할 수 있고 박선재 어르신의 임무도 완수하는 셈이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