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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우연이야 수작이야?

박선재는 잔뜩 화내면서 전화를 끊었다. ‘서진이 이놈, 따끔하게 혼내야겠어. 여행 가는 게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집에 와서 말해줘도 되잖아.’ 그도 그럴 것이 수지가 이제 막 대성 별장에 입주했고 아직 하룻밤도 못 지샜는데 다음날 곧장 이 아이를 내버려 두고 외출해야 한다니. 이건 당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수지야, 우리 서진이가 요즘 좀 바빠서 며칠 뒤에야 집에 돌아올 거야. 그때 가서 너희 두 사람 정식으로 인사시켜줄게.” 박선재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고 이에 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제가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만으로도 너무 폐 끼쳐드렸을 텐데 손자분 업무에 방해되면 더더욱 안 되죠. 저를 위해 일부러 돌아올 필요는 없어요.” “나중에 안 바쁘실 때 서로 알아갈 기회가 더 많을 겁니다.” “할아버지, 방금 손자분께서 내일 할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가신다고요?” 수지는 전혀 화내지 않고 신경 쓸 리도 없었다. 박서진이 안 돌아오는 건 그녀에게 오히려 좋은 일이니까. 이다은에게 성수 박씨 가문의 오더를 받으라고 했으니 수지도 곧 있으면 오성을 떠나게 된다. 그동안 박선재가 집을 비운다면 그녀도 굳이 출장을 위해 핑계를 둘러댈 필요가 없다. “그래. 애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짜고짜 여행을 간다네.” “수지 너도 우리랑 함께 가! 전에 보경시에 가본 적 없지?” 이에 수지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저 요즘 학교 나가서 교수님 도와드려야 해요. 여름방학을 좀 더 충실하게 보내려고요.” “손자분과 함께 여행 잘 다녀오세요.” 수지가 다소곳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하자 박선재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애가 꽤 소신 있네.’ 박선재는 더 강요할 수가 없었다. “그럼 볼일 다 보고 저녁엔 꼭 이리로 돌아와야 해!” “네, 그럼요. 걱정 마세요.” 수지가 순순히 대답하자 박선재도 그제야 그녀를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마친 후 수지는 피곤하다면서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이어서 그녀는 진미영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하동국 일행이 하늘 요양원을 떠났는지, 유정숙은 식사 후에 산책을 마치고 제때 잠들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됐다. ... 다음날, 수지는 아침 일찍 깨났다. 어제 미리 집사에게 박선재의 기상 시간을 여쭸는데 어르신은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신다고 한다. 그녀는 오늘 박선재가 깨나기 전에 빨리 이 집을 나서야 한다. 수지는 어르신께 고마움을 표하는 메모를 남긴 후 백팩을 메고 대성 별장을 나섰다. 별장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검은색 벤츠 지바겐이 대성 별장 길목으로 들어서더니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안에 올라탄 수지는 눈을 감고 계속 더 자려고 했다. “사부님, 식사 먼저 하시고 주무세요.” 이다은이 챙겨온 도시락을 꺼냈는데 수지가 손을 흔들며 거부했다. 뒷좌석을 개조해 침대로 만들었던지라 수지는 편하게 누워 이불을 덮고 바로 잠들었다. “운전해.” “에어컨 온도 잘 조절하고.” 이다은은 기사에게 분부한 후 안쓰러운 표정으로 수지를 위해 이불을 덮어주었다. 사부님은 이 몇 해 동안 김은경을 위해 수혈하느라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평일에는 기혈을 보충하는 음식도 많이 섭취하고 잠도 충분히 자야 한다. 오성에서 보경시까지 차로 몇 시간은 걸린다. 가는 길에서 수지는 물 한 모금 마시고 화장실 한 번 다녀온 뒤로 줄곧 잠만 잤다. 이다은은 가는 길 내내 그녀가 숨은 제대로 쉬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한번 사부님께서 한 어르신의 수술을 집도했는데 그 수술이 무려 20시간이나 이어지다 보니 수술실을 나온 후 사부님은 바로 기절해버렸다. 그때 이다은은 재빨리 수지를 위해 몸을 닦아주고 옷까지 갈아입힌 후 수액을 놓아주었다. 수지는 충분한 수면을 보충한 후에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 뒤로 이다은은 항상 수지의 건강을 걱정했다. 이번에 성수 박씨 가문에서 거금을 들여 치료를 부탁했을 때도 수지는 딱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상대의 증상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으니까. 병원 의사의 분부대로 몸조리를 잘하고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면 딱히 심장 질환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박씨 가문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고심 끝에 베일에 싸인 닥터 제니를 찾아냈다. 사부님은 아마도 그들의 성의에 감동하여 이번 치료에 응하신 듯싶었다. ... 몇 시간 후 벤츠 지바겐이 드디어 보경시 청주 사립병원에 도착했다. 현재는 7월 20일 오전 10시를 하루 앞둔 시각이다. 차에서 내린 수지는 백팩을 메고 청주 사립병원 원장실로 향했다. 청주 사립병원은 존재감 없던 작은 병원에서 최근 몇 년 사이에 갑자기 보경시에서 가장 유명한 사립병원으로 거듭났다. 이 병원을 명성을 떨치게 한 결정적 이유는 바로 모든 유명 교수들이 가망이 없다고 한 심장 수술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그 환자는 거의 사망 통보를 받은 거나 다름없어 집에 돌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보경시, 더 나아가 전국 최고의 심장 전문의들조차 감히 나설 엄두가 안 났다. 그런 수술을 청주 사립병원에서 성공시킨 것이다. 사망 통보를 받았던 그 환자분은 현재 누구보다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다은과 수지는 나란히 원장 최정수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수지를 본 최정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마중하러 나갔다. “오셨어요, 사부님.” “제가 미리 진료 차트를 보았는데 사부님께서 걸음 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사부님처럼 바쁘신 분이 이런 작은 케이스 때문에 보경시까지 오시는 건 무리인 듯싶었다. 최정수의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니까. 수지는 담담한 눈빛으로 최정수를 바라봤다. “자세히 봐보세요. 정말 작은 케이스가 맞는지.” 사실 수지는 잠에서 깬 후 차 안에서 이다은이 보낸 메일을 다시 한번 훑어봤는데 이번 환자가 얼핏 보기에는 쉬운 케이스 같아도 심장에 보아내기 어려운 큰 위험이 숨어있다는 걸 발견했다. 최정수는 곧장 진지하게 다시 한번 환자의 진료 차트를 훑어보았다. “환자분 오시면 우선 심장혈관 조영술 CT 검사부터 시키세요.” “다른 검사도 다 같이 진행하고 저에게 결과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네, 사부님.” “그럼 이젠 밥 먹으러 갑시다.” 수지는 오는 길에서 줄곧 잠만 잤으니 배가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최정수는 얼른 두 사람을 데리고 병원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 원장실을 나서자마자 맞은편에서 임수빈이 걸어오고 있었다. 수지를 본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잘못 본 줄 알고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는데 최정수가 작은 문을 열고 세 사람이 그리로 종적을 감춰버렸다. 임수빈은 눈을 비비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상하네, 수지 씨 맞을 텐데!’ “임 비서, 왜 그래?” 이때 박선재를 부축하고 걸어오던 박서진이 그에게 물었다. 박선재는 오는 길에서 줄곧 손주 녀석에게 푸념했다. 대성 별장에 돌아가 수지와 인사하지 않으면 이 할아버지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라고 마구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박서진은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말한 그 양 동생과 그분 손녀딸까지 지금 한창 자신을 이용해 재벌가에 시집와서 전세 역전을 하려는 거라고 말이다. 다만 입 밖에 꺼내려 할 때마다 박선재는 귀를 틀어막고 안 듣겠다는 식으로 머리를 마구 내저었다. 결국 박서진은 하는 수 없이 일단 이 일을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대표님, 저 방금... 수지 씨를 본 것 같아요.” 임수빈이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잘못 본 걸 수도 있는데 뒷모습이 정말 너무 닮았어요.” 순간 박서진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 여자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날 리가 있을까? 이건 절대 우연일 수가 없다. 박선재에게 일정을 묻고 일부러 이리로 달려온 거겠지... ‘허영심 많은 여자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정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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