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온유나는 삼촌으로 저장된 메모를 보더니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잠깐 사색에 잠겨있다가 끝내 전화를 받았다.
새하얀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하고 휴대폰을 귓가에 갖다 댔는데 말을 내뱉기도 전에 쩌렁쩌렁한 욕사발부터 터져 나왔다.
온태식이 다짜고짜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전형적인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비겁한 인간이다. 조카를 줄곧 만만하게 여기다 보니 지금도 이렇게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유나야, 너랑 성우진 이혼 소식이 터진 이후로 온성 그룹에 타격이 얼마나 큰 줄 알아?”
“그리고 온성 그룹 주식의 47%가 왜 갑자기 개인 투자자들로부터 전부 네 명의로 넘어간 거야? 너랑 유희 명의로 된 부동산은 또 어떻게 된 거고? 너희 아빠 유서는 왜 아직인데?”
“너희 엄마, 아빠가 돌아간 이후에 이 삼촌이 정성껏 보살펴줬더니 대체 이게 무슨 경우냐고? 말없이 성우진과 이혼하고 내게 온성 그룹이라는 골칫거리만 안겨줘?”
온태식이 줄곧 얌전히 지내온 이유가 바로 온성 그룹의 진정한 오너가 되기 위해서였다.
온태원이 죽으면 슬하의 두 딸아이가 이 국면을 다스리지 못하고 회사든 뭐든 싹 다 본인 명의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온태원이 또 이런 수를 두다니.
수년간의 모든 헌신이 그대로 헌신짝이 돼버렸다.
그 어떠한 혜택도 못 건졌으니까.
이전에도 남들 발아래에 짓밟히고 지금도 변함없이 짓밟히고 있다. 이런 느낌은 그 누구라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온유나는 휴대폰을 꽉 잡고 재빨리 대답한 게 아니라 그저 마음이 차갑게 식어 내려갈 뿐이었다.
아빠가 살아계실 땐 무용지물 같은 이 남동생의 모든 걸 포용해주고 집과 차, 심지어 회사에 이름만 걸어놓고 매년 배당금을 챙겨가게까지 했다.
그럼에도 이 꼴이 나다니.
실로 우스울 따름이었다.
온유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다가 코에 찬 바람이 새어 들어와 몸서리치게 했다.
그녀는 차가운 말투로 비아냥거렸다.
“삼촌이 한 말 다시 한번 되새겨봐요. 본인은 우습지도 않은가 보네요?”
“평생 무용지물 캐릭터로 살아오시다가 우리 아빠의 믿음을 사고 도움도 받아서 이미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뭐가 불만이죠 대체? 우리 아빠가 아니었으면 삼촌 능력으로 경운에 발이나 붙였을까요? 보는 사람마다 대표님, 대표님 불러주시는 거? 그건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겠죠!”
온유나는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말을 이어갔다.
“아빠가 주신 혜택을 누리면서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죠? 무고한 척 연기하면서 뒤에서 몰래 개인 투자자들 지분이나 끌어모으고 조만간 우리 아빠를 회사에서 내쫓을 작정이었잖아요. 삼촌 진짜 대단한 계략이네요.”
“집이 있으면 또 뭐요? 그건 아빠가 제게 남긴 보장이지 삼촌이랑 뭔 상관인데요? 유서를 기대하는 거예요? 아빠가 거의 돌아가실 때 삼촌은 지분 끌어모으느라고 정신없었으니 당연히 모르겠죠. 아빠 이미 유서 남기셨어요. 나랑 유희한테 이토록 많은 보장을 남겨주셨다고요. 뭐가 잘못됐나요?”
“삼촌이란 말 들을 자격도 없는 인간! 대체 무슨 낯짝으로 다짜고짜 나한테 쏘아붙이는 거예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러냐고?!”
온태식은 처음 조카에게 저격당하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너 성준이랑 짜고 쳐서 수작 부린 거지? 그래서 내게 속할 물건들을 다 뺏어간 거 아니야!”
온유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당신한테 속할 물건이지?”
그녀는 자지러지듯 웃었다.
“정말 눈에 뵈는 것도 없나 봐? 대체 뭐가 당신에게 속할 물건이냐고?”
“삼촌 재발 그 체면이나 좀 챙겨요.”
온유나의 부모님이 평생 심혈을 기울여서 구축한 가업인데 온태식이 가볍게 입이나 나불거린다고 뺏어올 수 있을까?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토록 파렴치한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건지, 심히 의심스러울 따름이었다.
남들이 삿대질하며 비웃을까 두렵지도 않은가 보다.
온유나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온태식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말로 그녀의 심장을 마구 찔렀다.
눈꽃이 흩날리는 한겨울, 그녀는 눈보라 속에 서서 그 말을 들어야 했다.
눈꽃이 옷에 떨어져 물방울로 녹아내리더니 그녀의 피부에 스며들고 뼛속까지 깊게 파고 들어갔다.
“유나야, 난 네가 항상 가엽더라. 고작 성우진에게 버림받은 아내일 뿐이잖아. 성우진도 너 싫다고 성씨 가문에서 내쫓았는데 대체 넌 뭐가 잘났다고 이렇게 우쭐거리는 거야?”
“성우진과 결혼한 3년 동안 공짜로 몸이나 바친 것 말고 네가 얻은 게 과연 뭘까? 말로 표현 못 할 분노가 가득 찼고 남편에게 상처받아 온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됐잖아. 그밖에 뭐가 더 있어? 이런 처지가 됐으면 널 아껴준 삼촌과는 뭘 더 뺏어내려고 다투진 말았어야지. 설사 네 손에 들어간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지켜낼 수 없는 물건들이잖아. 안 그래? 너 스스로 생각해봐. 지금 네가 얼마나 우스운지 말이야.”
온유나는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온태식이 한 말도 틀린 것 하나 없으니까.
성우진과 결혼한 3년 동안 오직 그녀만의 원맨쇼였다. 그녀 홀로 이지러진 이 감정을 애써 지탱해왔다.
온유나는 눈시울이 빨개지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막 반박하려 할 때 누군가가 대뜸 휴대폰을 뺏어갔다.
뒤돌아보니 한없이 짙은 눈동자와 마주쳤고 통화가 그대로 중단됐다.
온유나는 놀란 표정으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성우진이 그녀 손에 휴대폰을 쥐여주며 미간을 구기고 넌지시 물었다.
“너 벙어리야?”
이에 온유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 하나 없는데 내가 무슨 반박을 해?”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가벼웠고 바람이 일면 함께 흩날려갈 것만 같았다.
성우진의 차가운 시선에 복잡한 기운이 스쳤다.
결국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대기하고 있는 마이바흐 쪽으로 걸어갔다.
온유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밤이 지나면 두 사람은 영원한 남남이 된다는 것을.
그녀는 마지막으로 용기 내어 그를 불러세웠다.
“성우진,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바로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 오직 그녀만 기억하는 날짜였다.
성우진이 차 문을 열려다 말고 뭔가 생각난 듯했는데 정작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뭔데?”
“우리 결혼기념일이야.”
그녀가 답했다.
성우진의 눈앞에 수많은 장면이 떠올랐다.
그의 모습을 본 온유나는 이미 해답을 얻게 됐다.
성우진은 아무것도, 아예 아무것도 기억하질 못한다.
그녀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성우진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우리 결혼한 지 3년이야. 사실 올해까지 더하면 4년 째네. 지난 3년은 줄곧 나 혼자 지내왔어.”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마지막 기념일은 함께 보내. 그래도 한때 부부로 지낸 걸 봐서. 응?”
성우진은 그런 그녀가 조금 우스웠다.
“다 이혼한 판에 웬 결혼기념일? 웃겨 정말.”
온유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좀 웃기긴 하네.”
눈꽃이 그녀의 속눈썹에 떨어지자 눈동자가 더 맑고 영롱해졌다.
그녀는 거의 애원에 가까운 말투로 변해갔다.
“하지만 우린 결혼해서 신혼여행도 안 갔고 제대로 된 기념일도 안 보냈잖아. 오늘 내 소원을 들어줄 겸... 해피엔딩을 이루지 못한 내 염원에 거짓된 결말이라도 만들어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