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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으악! 사람 살려요. 작은 사모님이 호수에 빠졌어요.” 가식으로 가득 찬 구원이 텅 빈 별장 정원에 울려 퍼졌다. 어수선한 발소리와 함께 호숫가에 둘러싸인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아무도 진심으로 구원에 나서는 자가 없었다. 온유나는 온몸이 살얼음처럼 차가워지고 뜨거운 무언가가 몸 아래로 흘러내려 가는 느낌을 받았다. 꼭 마치 어떤 물체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오장육부도 잇따라 찢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 시어머니가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그녀의 짝퉁 하은별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두 팔을 껴안고 승리자의 자태를 뽐내며 저 멀리 정자에 서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또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온유나는 힘겹게 눈을 뜨고 남편을 바라봤다. 커다란 체구가 그녀의 앞에 드리워진 순간 한 줄기 희망이라도 붙잡듯 소리 내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물속이라 도통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성우진은 그저 무덤덤하게 걸어오더니 선뜻 그녀를 구한 게 아니라 호수 옆에 움츠리고 앉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맑고 깨끗한 호숫물은 그녀의 하반신에서 흘러내린 빨간 핏물로 물들었고 결국 자그마한 인공 호수를 핏빛으로 만들어놨다. 온유나는 서서히 시야가 흐릿해지고 몸에 힘이 빠지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다가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기절하기 직전, 그녀는 성우진의 차가운 얼굴에 띈 야유 섞인 미소를 보았다. 또한 처벌받지 않았다고 겁 없이 날뛰는 사용인들의 추악한 몰골도 지켜보았다. “사모님 수영할 줄 아시잖아요? 고작 요만한 인공 호수에서 왜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거죠? 도련님 동정심 유발하려고 연기하는 거예요? 이까짓 수작 부리면서 신났네요 아주.” 경운시 사람들이 거의 알다시피 성씨 가문 작은 사모님이라는 온유나의 명분은 단지 유명무실할 뿐, 성우진은 아예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녀와 결혼한 이유는 그 당시 성우진이 성진 그룹을 막 이어받아 수중의 인맥과 실력으론 다른 회사들과 대항할 힘이 한참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온성 그룹의 온유나가 나타났다. 온태원에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아이라 원하는 건 전부 이뤄줬다. 온유나가 19살 되던 해, 성우진에게 약혼 제안을 했고 회사와 가족의 이중 압박에 성우진은 마지못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만 20세가 되면서 둘은 혼인신고를 했고 어느덧 4년이란 시간을 함께해왔다. 온성 그룹의 도움으로 성우진은 곧장 성진 그룹을 안정시켰고 오직 그만의 비즈니스 판도를 개척할 수 있었다. 한편 온성 그룹은 온태원이 병으로 사망한 이후로 줄곧 하락세를 맞이했고 성진 그룹 덕분에 겨우 파산의 위기를 모면했다. 도시 전체가 성우진이 그녀를 발로 뻥 차버리길 기다린다. 다들 그녀의 우스운 꼴을 기대하고 있다. 온유나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은 정말 희대의 웃음거리란 것을. 이전에는 그래도 환상이란 걸 품었었다. 4년이란 시간 동안 아낌없이 베풀어주면 꽁꽁 얼어붙은 마음일지언정 사르르 녹아내릴 거라고 말이다. 다만 아쉽게도 성우진에겐 마음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호수에 빠지고 성우진이 움츠리고 앉아서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그 순간부터 온유나의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이 무너져내리고 그녀의 마음도 차갑게 식어갔다. 15년간의 사랑은 길고 절실한 한차례 꿈에 불과했고 인제 그만 깨어날 때가 되었다. ... 온몸을 파고드는 극심한 고통에 온유나가 잠에서 깼다. 귓가에는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스듬히 눈을 뜨자 하얀 광경이 병원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차갑고 무뚝뚝한 소리가 들려왔다. “깼어?”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에 온유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들이 또다시 뇌리를 스쳤고 그녀는 저도 몰래 침대 시트를 꽉 쥐게 되었다. 손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실핏줄이 튀어 오르고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성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맡으로 다가오더니 거만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짙은 눈동자는 혹한의 날씨처럼 매섭고 싸늘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온몸이 움찔거리고 뼛속까지 후벼 파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윽한 눈빛 속에 담긴 그의 속내를 좀처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때 온유나가 갑자기 웃다가 흉터를 건드렸는지 예쁜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이전에 성우진이 아무리 쌀쌀맞게 굴어도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이유를 막론하고 무작정 달려갔던 그녀가 잘못이지. 이 모든 게 자업자득이었다. 적어도 온유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외롭지만 앞만 보고 달렸던, 그 무모했던 짝사랑은 원하는 결과도 이루지 못한 채 오늘부로 철저히 종료됐다. 그녀는 자신만의 세상이었던 성우진을 인제 그만 단념하고 씁쓸한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온유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억지 미소를 지으며 강요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이토록 나약한 처지에서 애써 강요하며 묻는 것 자체가 우스울 따름이었다. “여전히 날 안 믿는 거야?” 성우진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고 눈가에 스친 야유가 선명하게 보였다. “널 어떻게 믿어야 할까?” 그는 온유나의 턱을 집어 올려서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그해 나 데리고 언덕까지 헤엄쳐갔다면서? 그렇게 깊은 수심에서도 너보다 덩치 큰 날 데리고 언덕까지 헤엄쳐갔는데 대체 인공 호수에서 왜 그런 거야? 깊이가 아예 비교가 안 되잖아!” 성우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유나야, 자살 소동은 말이야 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나 쓸모가 있어. 나도 한두 번쯤은 재미 삼아 지켜볼 수 있겠지만 밥 먹듯이 비열한 수작 부리지 마. 연기하는 너는 안 힘들겠지만 난 이젠 질릴 대로 질렸어.” 온유나는 그에게 잡힌 턱이 너무 아파 애써 벗어나려 했지만 무기력한 나머지 몸부림칠 힘조차 없었다. “누가 날 밀쳤어. 입고 있던 옷이 너무 두껍고 무거워서 미처 일어나질 못했고. 내가 한 말 믿을 수 있겠어?” 온유나는 그가 안 믿는다는 걸 너무 잘 안다. 그의 두 눈동자에 사랑이라곤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우진이 손에 힘을 풀자 온유나는 베개에 툭 쓰러졌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에 붉은 자국이 남아 실로 안쓰럽고 가여울 따름이었다. “내가 바보로 보여?” 말인즉슨 그녀의 말을 전혀 안 믿어주는 성우진이었다. 온유나는 속으로 이런 저 자신이 너무 아니꼽고 우스웠다. 안 믿어줄 걸 뻔히 알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품으며 또 한 번 물었으니까. 스스로 칼을 들어 본인 심장에 마구 난도질하는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괴로웠다. ‘온유나, 대체 얼마나 더 비참해지려고 그래?’ 그녀가 속으로 되뇌었다. “그렇다면 이젠 자유를 돌려줄게.” 온유나가 일어나 앉으며 허리를 곧게 폈다. “우리 이혼해.” 이토록 간단한 한마디인데 정작 내뱉고 나니 왜 이렇게 씁쓸하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까? 말을 내뱉는 순간 커다란 돌덩어리가 정확하게 그녀의 몸을 짓누른 것처럼 숨이 올라오지 않았다. 한편 눈앞에 있는 그 남자는 단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살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그녀의 마음에 조금씩 스며들어 꽁꽁 얼어붙게 했다. 온유나는 퀭한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왜? 나 같은 악덕 와이프랑 사는 것도 꽤 좋은가 봐? 막상 이혼하려 하니까 아쉬운 거야?”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병원 진단서가 그녀 손에 쥐어졌다.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성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감히 아이를 빌미로 삼아? 너 진짜 대단하다 온유나!” 아이라니? 갑자기 아이가 웬 말인가? 온유나는 고개 숙여 진단서를 내려다보았는데 눈물이 메마르고 고갈되었다고 생각했던 두 눈가에 또다시 서서히 고이기 시작했다. [자궁 내 임신 61일, 완전 유산.] 짤막한 몇 글자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이미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심장을 또다시 마구 찔렀다. 선홍빛 핏물이 뿜어져 나왔고 군데군데 핏자국만 남게 됐다.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데 그녀는 전혀 몰랐다. 눈앞의 이 남자는 심지어 온유나가 일부러 아이를 빌미로 삼았다고 여기고 있다. “너도 예상 밖이지? 4년 동안 갖은 궁리를 다 하더니 이게 다 네 업보야.” 준수한 얼굴에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하고 쌀쌀맞은 표정을 짓고 있는 성우진이었다. “아이 잃은 건 그 누구도 탓할 필요 없어. 결국 너 스스로 아이를 해쳤어!” 곧이어 또 한 부의 서류가 하얀색 침대 시트에 떨어졌다. 그건 바로 이혼협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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