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한편 7살짜리 그 아이는 민준혁 친형의 아이이다. 친형과 형수님은 두 분 모두 과학 연구 대가여서 항상 ‘실종’상태에 처해있다.
결국 민준혁이 조카딸을 친자식처럼 키우게 되었다.
소은비도 하는 수 없이 방금 뭘 만졌는지 모른 척해야만 했다.
그녀는 달걀을 다 나눠준 후 김민숙이 싸준 삶은 옥수수와 찐빵, 그리고 군용 물병까지 꺼내서 창가 옆에 앉아 묵묵히 점심을 먹었다.
민준혁은 그녀에게 건네받은 달걀을 보더니 차갑고 어두운 눈동자에 경계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남자는 얇은 입술을 앙다물며 생각했다.
‘얘가 이기적으로 달걀을 독차지한 게 아니라 한 명씩 다 나눠주네?’
이건 확실히 민준혁이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또한 그의 일방적인 추측으로 소은비를 오해한 꼴이 됐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성은 단시간 내에 바뀔 순 없으니 이런 비정상적인 행동은 뒤에 분명 더 큰 음모가 숨겨있을 거로 여겼다...
어젯밤에 민준혁은 소씨 가문에서 나와서 일부러 마을 이장님 댁에 들러 마을 주민들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체크했는데 전부 사실이었다.
결론은 소은비가 어린 나이에 끊임없이 꼼수와 계략을 부리고 진안에 가서 더 높은 곳까지 기어오르기 위해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자상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다만 그건 그렇고 민준혁은 약속한 바를 이뤄야 했다.
그는 본인 달걀을 소은혜에게 건넨 후 휴대용 파란색 업무 수첩을 꺼내 펜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적었다.
한이경은 단장님이 수시로 업무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는 걸 알기에 곁눈질로 힐긋 보았는데 종잇장에 [반성문]이라는 세글자가 힘있게 적혀있었다.
맙소사, 그는 지금 소은비에게 반성문을 쓰는 중이었다.
민준혁은 비록 매일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엄하게 다스리지만 이토록 자신에게 엄격하고 잘못을 바로 인정하는 리더를 대체 누가 존경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이경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손에 쥔 달걀을 소은비에게 돌려주었다.
“은비 씨 드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소은비가 손을 흔들며 이제 막 대답하려다가 마침 퍽퍽한 노른자에 목이 멨다.
이를 본 한이경은 서둘러 물병 뚜껑을 열고 그녀에게 건넸다.
다만 민준혁의 경고에 찬 싸늘한 눈빛과 마주하게 되는데...
무언의 압박감에 한이경은 등골이 오싹했다. 대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설마 민준혁이 소은비에게 호감이 있어서 딴사람이 챙겨주는 게 아니꼬웠던 걸까?
한이경은 억울할 따름이었다. 그는 절대 그런 취지가 아니었으니까.
방금 소은비가 낑낑거리며 뚜껑을 못 열 때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아서 한이경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녀는 물병을 건네받고 한 모금 마시더니 그제야 한결 편안해져서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워요, 이경 씨. 저 달걀 하나면 돼요.”
그도 그럴 것이 김민숙이 물이 새어 나올까 봐 뚜껑을 너무 꽉 비틀어놓은 바람에 좀처럼 열리지 않아 나중에 다시 열어보기로 했다가 마침 사레 걸리고 말았다.
드디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니 갈증이 순식간에 해소됐다.
다만 너무 많이 마셔서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열차 안에는 짐보따리가 너무 많아 행인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매우 비좁았다. 그녀는 겨우 화장실까지 가서 볼일을 보고 나왔는데 민준혁이 훤칠한 몸매로 반듯하게 앞에 서 있었다.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조각상을 방불케 했다.
소은비는 그도 화장실에 가려는 줄 알고 머리를 숙인 채 옆을 스쳐 지나갔다.
“받아, 반성문이야. 일단 읽어보고 빠트린 부분 있으면 얘기해. 다시 수정할게.”
민준혁이 싸늘한 눈빛으로 무표정하게 말하며 빼곡하게 적은 반성문을 그녀에게 건넸다.
소은비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냥 한번 해본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반성문을 쓸 줄이야.
“이미 사과하셨잖아요. 이렇게까지 엄숙할 필요 없어요.”
한편 민준혁은 꿋꿋이 반성문을 건네며 단호하게 말했다.
“사과는 사과고 잘못을 인지하는 건 별개의 일이지. 잘못을 저질렀으면 제때 반성하는 게 맞아.”
이 남자는 그야말로 정직하고 애증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소은비는 마지못해 반성문을 받았는데 이제 막 손을 씻고 나와 물기가 묻은 손으로 깨끗한 종잇장을 살짝 적셔버렸다.
민준혁은 그녀의 새하얀 손가락을 보더니 저도 몰래 좀전의 일이 떠올랐다.
‘이 손으로 아까 날 만졌던 거야?!”
그는 곧장 사색에서 벗어났다.
“은혜가 그러는데 내가 쓴 편지를 네가 다 가져갔다면서? 얼른 돌려줘.”
또다시 시작된 차가운 말투, 그에게서 한없이 싸늘한 기운과 무언의 압박감이 흘러넘쳤다.
실은 소은혜가 감히 소은비에게 돌려달라고 말할 엄두가 안 나서 조심스럽게 민준혁에게 이 일을 일러바친 것이다.
민준혁과 소은혜는 알고 지낸 지 6개월밖에 안 됐고 편지도 고작 네댓 통이 전부였다. 내용은 마치 보고를 올리듯 무미건조하고 딱딱했으며 꼭 마치 선생님 말투처럼 공부를 잘하고 운동도 부지런히 하라는 게 전부였다.
이 또한 원주인 소은비가 민준혁을 별로라고 여긴 이유 중 하나였다.
그건 그렇고 원주인이 진작 편지를 불태워버렸고 그때 소은혜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한 장이라도 수습하려고 애썼다.
이제 와서 이 일을 민준혁에게 일러바친 건 방금 한 방 먹어서 소은비를 골탕 먹이려는 작전이었다.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소은혜는 한이경을 찾아가 배려 깊고 현명한 소은비의 이미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생각이었다.
소은비가 얼마나 추악하고 음흉한 사람인지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한편 소은비는 진안에 가서 학교 다닐 계획이 그 누구보다 명확했다. 좋은 대학에 붙고 안정한 직장을 찾아서 편히 일하는 것 외에 원주인이 전에 쌓았던 모든 인맥을 단절하고 과거를 깨끗이 지운 후 새롭게 출발하는 마음으로 인맥도 새로 쌓아갈 예정이었다.
이토록 보수적이고 정보가 결핍된 80년대에 맞선 상대를 뺏기 위해 하마터면 인명피해까지 이룰 뻔한 사건은 아마 평생 삿대질을 당할 일이고 그녀의 향후 생활에도 극심한 타격을 줄 것이다.
그녀가 인맥을 단절하고 싶은 명단 속에는 민준혁 뿐만 아니라 전체 민씨 가문이 포함되어 있다.
결국 그녀는 솔직하게 이 일을 인정했다.
“죄송해요. 그 편지들 제가 다 불태웠어요. 은혜도...”
‘이미 알고 있고요.’
그녀는 말끝을 흐렸고 민준혁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는 매정하게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더는 들을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지...
소은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민준혁의 냉정한 태도는 이미 게시물을 보면서 충분히 익숙해졌으니까.
소은비가 제자리에 돌아온 후 한이경은 무언가 탐구하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늘 그렇듯 환한 미소를 지었고 그녀도 가볍게 웃었다.
기차가 진안에 도착할 때 어느덧 7시 반이라 날이 어두워지고 비까지 내렸다.
부대 단지, 민씨 저택.
자동차의 밝은 불빛이 2층 스테인드글라스를 비추자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던 민용수는 아들 준혁이가 소씨 가문의 두 자매를 데리고 왔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의 반대편에서 백발의 노 혁명가 진영자가 돋보기안경을 벗고 창밖의 자동차를 내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왔구나.”
곧이어 또다시 수중의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소은비가 진안에서 학교에 다니는 것 때문에 민용수의 아내 성해원은 그와 대판 싸웠다. 제 친여동생까지 죽일뻔한 살인범을 절대 진안에서 학교를 보낼 수도 없고 민씨 저택에서 지내게 하는 건 더더욱 반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