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자식.”
밤하늘의 환도는 잠든 거북이 같았다. 저녁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며 기슭을 두드려도 어두운 조명 아래 남녀가 내는 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사저, 소란 피우지 말고 가만히 누워 계세요. 제가 마사지해 드릴게요.”
진태평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 나서 해변 의자에 엎드려 있는 사저 천성희를 힐끗 쳐다보고 침을 삼켰다.
반쯤 가려진 빨간색 얇은 시폰 롱드레스는 어두운 조명 아래 아련하고 굴곡진 몸매를 돋보이게 해 유혹을 더 했다.
천성희는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렸는데 용모가 빼어났다. 가느다란 눈썹 아래 한 쌍의 초롱초롱한 눈이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오뚝하고 오뚝한 콧날 아래 붉은 입술을 삐죽하고 화를 내며 불만을 퍼붓고 있었다.
“힘이 얼마나 센 줄 알면서도 힘을 다해 날 때렸어?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려고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천성희가 코를 찡긋하며 투덜댔다.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내자 진태평은 가슴이 뜨끔해지며 손동작도 멈췄다.
“3년이나 지났으니 돌아가야죠.”
진태평의 마음속에는 빛이 있었다.
“부모님을 뵈려는 가야 하잖아요. 지난 3년 동안 두 분에게 전혀 소식을 알리지 않았으니깐요.”
3년 전.
진태평은 천해의대를 졸업하고 여자 친구 유단비와 함께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어느 날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던 중 우연히 악당들의 추행을 당하고 있는 여자 친구를 만났고, 혈기왕성한 진태평은 화가 치밀어 악당을 때려 병원에 입원시켰다.
진태평은 상해죄로 5년 동안 감옥에 들어갔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줄곧 환도 감옥에 있었지만, 감옥에 들어간 첫날 사부님을 모시고 의술과 무술을 익혔으며 천책파에 가담하여 새로운 세대의 옥황(狱皇:감옥의 황제)이 되었다.
천성희와 싸워 이기는 것이 환도 감옥을 떠나는 유일한 조건이었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그는 천성희를 때렸다.
"그렇기도 하지."
천성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천성희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 자식, 사저 몸매가 좋아, 네 여자 친구가 몸매가 좋아?”
“사저 뭐 하는 거예요...”
진태평은 사저의 질문에 얼굴이 빨개졌다.
“사저, 저를 유혹에 빠뜨리지 마세요. 사부님이 제 다리를 부러뜨릴까 봐 두려워요.”
“쳇!”
“아직도 사부님이 무서워?”
...
다음날 오전 9시, 천해시 공항.
진태평은 낡은 캔버스 가방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도 유난히 오밀조밀해 보이는 단아한 눈매와 깊은 눈매가 돋보였다.
“성화원으로 가주세요.”
택시에 오른 진태평은 주소를 말하고 나서 3년 동안의 천해시 변화를 지켜보며 감탄했다.
“3년이나 지났는데 부모님이 아직 건강하실지 모르겠네. 날 미워하시겠지.”
3년 전, 진태평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식이었다. 인성이나 학업, 직장 모두 완벽한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그리고 3년 전, 그는 감옥에 갔다.
과거에 관한 생각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고, 차는 성화원 앞에 멈춰 섰다. 무너진 대문을 바라보며 고향에 돌아왔다는 기분 탓인지 진태평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앞으로 나아가 문을 두드렸다.
“끼익!”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녹슨 철문이 열렸다.
“엄마.”
발을 들고 들어간 진태평은 구석에 있는 한 아줌마가 허리를 굽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백발의 그녀는 얼굴이 초췌해 보였는데 진태평은 한눈에 이 노부인이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태, 태평?”
유옥자는 흠칫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태평을 바라보았다.
“태평아, 내 아들, 정말 너 맞아?”
“엄마!”
진태평은 달려가 어머니를 안고 가슴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는 올해 겨우 쉰 살이지만, 오히려 7, 80대 할머니처럼 노쇠해 보였다. 걸음걸이도 비틀거리고, 새우등처럼 휜 몸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 저 맞아요.”
“돌아왔으면 됐다. 돌아왔으면 됐어.”
눈물을 참지 못한 유옥자는 진태평의 얼굴을 받쳐 들고 어깨를 세게 두드렸는데 혼탁한 두 눈에서 마침내 빛이 났다.
집에 들어간 후, 유옥자는 또 진태평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줬다.
“태평아, 5년 형을 선고받지 않았어? 어떻게 벌써 나왔어?”
아들이 홧김에 사람을 다치게 하고도 조정에 응하지 않아 5년 형을 선고받았던 기억이 났다.
‘겨우 3년이 지났는데 왜 벌써 나온 거지?’
“의학을 전공해서 감옥에서 많은 사람을 도우며 착하게 잘해서 감형받았어요.”
천책파는 신비한 조직이라 진태평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짓말을 지어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는 멀쩡하던 집이 왜 이렇게 망가졌는지 궁금함이 피어올랐다.
성화원은 도시 변두리에 있지만 그 지역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고, 진씨 가문은 대대로 의술에 종사해 왔기 때문에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왜...
“엄마, 아빠는 병원에 계세요? 점심에 집에 돌아와 밥 드세요? 그건 그렇고, 형님 형수님 일은 잘 돼가시죠? 소이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겠죠?”
진태평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난 3년 동안 단비가 엄마 아빠한테 잘해줬어요?”
“휴!”
진태평의 물음에 유옥자의 막 그친 눈물이 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네 형님 형수님 돌아갔어. 차가 갑자기 통제 불능이 되어 강에 빠졌는데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 네 아버지는...”
“진혁재, 이 영감 탱이 나와! 평생 두더지처럼 숨어 살 거야?”
그때 누군가 대문을 발로 차 열더니 소리를 지르며 들어왔다.
진태평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마중 나가려고 했다. 진혁재는 그의 아버지인데, 어찌 외부인이 이렇게 모욕하게 놔둘 수 있단 말인가.
“하지 마!”
유옥자는 안색이 변하여 황급히 진태평을 끌고 침실에 밀어넣으며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어서, 어서,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어. 내가 너를 부르지 않으면 절대 나오면 안 돼. 저자들은 나 같은 노인네를 어떻게 하지 않을 거야. 어서 들어가...”
“꽈당!”
그러자 나무문이 부서지더니 웃통을 벗은 남자 세 명이 담배를 물고 뛰어 들어왔다.
“숨어? 어디 숨는 거야? 네가 돌아온 걸 내가 직접 봤는데... 아니, 진혁재이 아니라, 진혁재의 아들이야?”
앞장선 노랑머리 황기수는 의아해하며 진태평을 쳐다보았다.
“맞아. 난 진혁재의 아들 진태평이다.”
진태평은 가슴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눈빛을 칼같이 쏘아보며 건방지게 네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진 빚은 자식이 갚는 게 도리지. 아들이 대신 갚아도 돼. 돈 갚아!”
황기수는 진태평 앞에 손을 내밀었다.
“네 아버지는 우리 진구 형에게 4000만 원을 빌렸는데 이미 기한이 10일 정도 지났으니 빨리 돈을 갚아.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짐 싸서 집을 비워.”
“4000만 원? 우리 아빠가 빌렸다고?”
진태평은 미간을 찌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엄마, 아빠가 밖에서 돈을 빌렸어요? 우리 병원은 줄곧 장사가 잘되는데, 왜 돈을 빌린 거예요?”
진태평은 추궁하지 않았다.
“휴, 송이가 아파. 급성 백혈병인데 네 아버지가 포기하지 못해. 어쨌든 네 형과 형수가 남긴 유일한 핏줄이잖아. 그래서 저쪽에서 1000만 원을 빌렸어.”
유옥자는 어쩔 수 없이 집안의 큰 변고를 낱낱이 말했다.
“자식, 돈 갚아. 우리는 여기서 너희들과 실랑이할 겨를이 없어.”
황기수가 독촉했다.
“빚은 갚는 것이 당연한 일이야. 염치가 좀 있었으면 좋겠어.”
“돈은, 갚을 거야.”
진태평은 마음속으로 피를 흘리며, 집안의 변고로 인한 고통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좀 줘, 나는 방금 집에 왔어...”
“네 어미, 네 아비와 핑계가 똑같아. 사람을 속이려면 다른 핑계를 생각해 봐. 네 장애 아비와 똑같이 굴지 말고!”
그 말을 들은 황기수는 화를 버럭 내며 입에 올리기도 거북한 욕설을 퍼부었다.
“장애?”
순간 진태평은 휘청거리며 하마터면 똑바로 서지 못 할 뻔했다.
“우리 아빠가 왜?”
“2년 전, 네 큰 형과 형수가 사고를 당한 후 네 아버지는 보험회사에서 배상한 돈을 은행에 예금하러 갔다가 길에서 강도를 만났어.”
유옥자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발생한 일 하나하나가 마치 뼈를 깎는 칼처럼 유옥자의 가슴을 한 번 또 한 번 찔렀다.
“그건 네 형과 형수의 목숨값이니 네 아버지는 당연히 뺏기지 않으려 했지. 결국 강도한테 맞아 다리 한쪽이 부러졌고 배에 칼이 찔렸어. 그때 만약 제때 응급처치를 하지 않았다면 네 아버지도 돌아가셨을 거야...”
“그만 좀 징징 대. 무슨 쓸데없는 말이 그렇게 많아?”
황기수가 귀찮은 듯 말을 잘랐다.
“나는 너희 모자의 슬픈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없어. 돈 갚아, 그렇지 않으면 당장 짐 싸고 나가. 이 집은 이제 우리 것이야...”
“꺼져!”
진태평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3년 만에 돌아와 거의 망해가고 있는 집을 보며 어떻게 사채업자에게 예의를 갖출 수 있겠는가.
지금 안간힘을 써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사람을 죽일지도 몰랐다.
“뭐? 감히 꺼지라고? 죽여버릴 거야!”
황기수는 멍해져다가 손을 들어 한 주먹으로 진태평의 얼굴을 내리치려 했다.
“우리 아들을 때리지 마세요...”
자식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앞선 유옥자는 쇠약한 몸으로 아들 앞을 막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