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연준호는 미세하게 떨고 있는 안이서의 연약한 몸과 매끄러운 이마에 맺힌 땀을 보고 바로 소현정의 말 때문에 불편해하는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안이서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면서도 자신의 앞에 서서 버티는 모습을 보니 남자인 자신이 연약한 여자가 혼자 골치 아픈 여자를 상대하게 두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준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안이서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자신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주려 했다.
순간 안이서는 연준호에게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생각했다.
‘아마도 날씨가 춥고 저녁에 옷을 얇게 입고 나와서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아니면 어떻게 연준호의 품에서 이렇게 안심이 될 수 있어. 아마 저혈당 때문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때 연준호의 목소리가 안이서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오늘 경찰서에서 밤을 보내지 않은 건 이서가 너그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선 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러더니 안이서가 가쁘게 숨을 쉬는 걸 보고는 소현정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제가 할 말은 다 했습니다. 더는 건드리지 마세요. 안 그럼...”
연준호는 소현정이 아까 안이서를 협박하듯 말하던 것처럼 똑같이 역으로 위협하며 소현정도 자신이 한 행동에 두려움을 느끼게하려 했다.
한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이서는 내내 좌석에 기대어 불편해했다.
소현정이 대학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마치 다시 그때의 수많은 시선들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불안했다.
그러다 연준호가 가는 길에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안이서는 그가 왜 내렸는지 물어볼 힘조차 없었다.
잠시 후 연준호는 차로 돌아와 안이서에게 따뜻한 밀크티를 건넸다.
“너 저혈당 온 것 같아. 내가 단 거로 사 왔으니 이거 마시면 좀 나아질 거야.”
얼굴이 창백한 안이서는 고맙다는 말조차 할 힘이 없어 밀크티를 쥐고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연준호는 그런 그녀의 곤란함을 눈치채고 밀크티를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생존 본능에 따라 빨대가 입에 닿자 안이서는 몇 모금 마셨고 금세 몸이 따뜻해지면서 아까 느꼈던 어지러움이 서서히 가셨다.
조금 기운을 차린 안이서는 밀크티를 받아 들고 연준호의 보살핌을 받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더 이상 투정 부린다고 오해받기 싫었다.
안이서가 여전히 약한 모습으로 애쓰는 걸 보며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던 연준호는 잠시 생각을 접기로 했다.
“좀 나아졌어?”
연준호는 안이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많이 좋아졌어요...”
안이서는 힘없이 대답하며 연준호를 향해 물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내가 경찰서에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연준호는 안이서가 말하기를 꺼려한다면 굳이 물어보지 않을 사람이다. 다만 필요한 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부담스러워하면 그걸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안이서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며 아까 소현정이 말했던 ‘천천히 이야기하자’는 말을 떠올렸다.
‘차라리 미리 상황을 알려주는 게 낫겠어.’
“이름은 소현정이고 내 새엄마예요. 오늘 밤 언니 집에 가서 큰 소란을 피웠어요. 그래서 나랑 내 친구, 아까 준호 씨가 봤던 백지효가 경찰을 부른 거예요.”
안이서는 오늘 밤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제야 연준호는 소현정이 안이서를 고향으로 데려가 마을 이장의 아들인 이창준과 결혼시키려다 실패하자 안이서가 자신과 결혼해 이사 간 것을 알고 언니 안채아의 집으로 난동을 부리러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언니가 널 지키려다가 그런 일을 당한 거고, 넌 언니가 당하는 걸 보고 참지 못해서 경찰에 신고한 거네.”
연준호가 간단히 정리했다.
“네.”
안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가족을 경찰에 신고하는 행동이 비난받기 쉬운 일이었지만, 안이서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소현정이 안채아 집에서 외친 ‘너희들 십 년 내내 불행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말만 봐도 그녀는 이미 안이서와 안채아를 가족으로 보지 않았다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을 가족으로 대할 필요도 없었다.
“준호 씨도 아무리 그래도 새엄마가 나를 키워줬으니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안이서는 가끔 뉴스를 볼 때마다 인터넷 댓글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한 피해자들이 어떻게 고통받는지 봐왔기 때문에 불안감이 스쳤다.
연준호는 안이서가 이렇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애쓰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가족한테조차 충분한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보면 안이서는 엄마를 잃은 그 순간부터 이미 불행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