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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장

이다빈은 살짝 눈꼬리를 찡그렸다. 착각 때문인지 남자의 말에 뭔가 다른 정서가 묻어 있는 듯했다. “이사를 나오는 거니까 가족들에게 확실하게 얘기해야죠.” 말하면서 캐리어를 끌고 계단 입구로 갔다. “내가 들어줄게요.” 박현우는 이다빈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캐리어를 그녀의 손에서 빼앗았다. 이다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갑자기 자기에게 잘해주는 박현우를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두운 얼굴로 음흉하게 말하던 사람이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게 변했을까? “아니에요. 무겁지 않아요. 내가 들 수 있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이다빈은 캐리어를 그의 손에서 갖고 오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캐리어를 돌려줄 생각 없이 혼자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방문 앞에 와서 문을 밀고 바로 들어갔다. 이다빈은 오늘따라 남자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무슨 약이라도 잘 못 먹은 것일까? 도대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방에 그토록 들어가기 싫어하지 않았던가? 이다빈도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공손하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괜찮아.” 2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박현우가 여전히 방에서 나가지 않자 이다빈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 별일 없으니까 가봐도 돼요.” 박현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 서 있었다. 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한 판 더 해.” 이 말에 이다빈은 그제야 박현우가 바둑을 더 두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늦었어요. 내일 학교에도 가야 하고요. 다음에 시간 나면 둬요.” 박현우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봤다. “늦긴 늦었네.” 말을 마친 후 방안에는 다시 야릇한 정적이 흘렀다. 이다빈이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현우를 쳐다봤다. 왜 아직도 안 가지? 박현우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이다빈이 가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족들하고 다 얘기했어요?” “얘기했어요. 앞으로 한 달은 밖에서 지낼 거라고요.” “동의했어? 다른 것은 물어보지 않았어?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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