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정씨 가문의 저택.
밤이 깊어질 무렵, 이정아는 실크 슬립 차림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정성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젊었을 때 미인으로 유명했다. 정성훈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살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다 재혼한 정성호가 정성훈의 유산과 회사를 이어받아 점점 더 사업을 키우면서 그녀도 사모님이 되었다. 꾸준히 관리해 온 덕에 지금도 예전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때 별장 대문이 열리며 정성호가 들어왔다.
이정아는 바로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 그를 맞았고 겉옷을 벗겨 주었다.
“여보,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성실하지만 무뚝뚝했던 정성훈과 달리, 정성호는 젊었을 때부터 멋지고 잘생겼다. 지금은 회사를 이끄는 대표가 되어 더욱 당당해 보였다. 그런 모습이 이정아를 사로잡았다.
“오늘 저녁에 접대가 있었어.”
이정아는 정성호의 양복에서 나는 향수 냄새를 맡았다. 낯익은 향이었다. 새로 들어온 여자 비서가 쓰는 향수였다.
이정아는 화가 나서 말했다.
“여보, 또 그 여자 비서랑 같이 있었던 거죠?”
정성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게 대답했다.
“왜 또 의심이야. 제이 신의가 아름이를 치료 안 해준다고 해서 아름이 기분도 안 좋거든? 이럴 시간 있으면 아름이나 달래 줘! 난 피곤하니까 올라가서 쉬겠어.”
그는 바로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러자 이정아가 불쑥 말했다.
“저한테 제이 신의를 데려올 방법이 있어요.”
정성호가 걸음을 멈추더니 곧 돌아와 한 팔로 이정아 어깨를 끌어안았다.
“당신 정말 대단해. 날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는군. 당신은 내 보물이야.”
그는 여자를 참 잘 달랬다. 그런 태도는 이정아의 감성을 완전히 충족시켰다.
이정아는 그의 품에 기대며 요염하게 흘겨봤다.
“단서가 있어요. 대신 그 여자 비서 당장 잘라 줘요!”
“알겠어. 내일 바로 자를게.”
그러고는 이정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정아는 온몸에 힘이 풀리며 눈가에 봄기운이 감돌았다.
“아까 피곤하다면서요?”
그녀의 슬립이 약간 풀리면서 섹시한 레이스 란제리가 드러났다. 정성호는 짓궂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야한데 누가 참아?”
이정아가 살짝 그의 가슴을 치며 말하자 정성호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당신 정말 못됐어요”
“싫진 않잖아?”
...
다음 날.
정라엘은 아파트에서 이정아의 전화를 받았다. 이정아는 꽤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라엘아, 저번에 병원에서는 엄마가 잘못했어.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한 상 가득 차려 놨거든. 집에 한 번 와 줘.”
주방에서 서다은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라엘아, 가지 마. 네 어머니는 정성호 그 인간한테 바짝 붙어 사는 사람이잖아. 저 나이 먹고도 사랑에 눈이 멀었으니 답 없어.”
정라엘은 담담하게 바쁘다고 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러나 이정아가 이어서 말했다.
“라엘아, 네가 태어났을 때 아빠가 딸 낳으면 묻어 두자고 한 지참금이 있잖니. 네가 다 자라면 꺼내서 같이 마시려고 했던 거야. 지금 그 술 꺼내 놨어. 집에 좀 와.”
정라엘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이정아는 그녀가 무엇에 약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결국 정라엘은 저택으로 왔다. 정성호와 정아름은 없었고, 이정아는 정말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 놨다. 식탁 위에는 지참금 술병도 놓여 있었다.
지참금이라는 글자는 정성훈이 직접 써 둔 것인지 필체가 서툴렀다. 정성훈은 학력이 높지 않았지만 스스로 부를 일궈 낸 사람이었다. 그와 달리 정성호는 그 시절 이미 대학을 나왔던 인물이다.
정라엘은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지참금’ 부분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녀에게도 참 행복했던 유년기가 있었다. 정성훈은 어릴 적 정라엘을 가장 아꼈다.
오늘 이정아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지참금을 따서 술을 두 사발에 나눠 담았다. 한 사발은 본인, 다른 한 사발은 정라엘의 몫이었다.
“라엘아, 우리 건배하자.”
정라엘은 이정아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신 거예요?”
그 말에 이정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사발의 술이 거의 쏟아질 뻔할 정도였다.
이정아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라엘아, 네 아빠는... 병으로 돌아가셨어. 말해 줘도 넌 몰라. 의사도 아니잖아.”
정라엘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발 가득 따른 술을 단숨에 마셨다.
‘내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꼭 알아낼 거야.’
그녀는 빈 사발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볼일 있어요. 먼저 갈게요.”
바로 이때 안준휘가 나타났다. 정라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세요?”
중년의 안준휘는 겉보기에는 점잖아 보였다. 그러나 그 시선은 정라엘을 위아래로 훑으며 음흉한 웃음을 띠었다.
이정아가 술 사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라엘아, 이분은 한의원의 안 실장님이야. 제이 신의를 아는 분이라서 아름이 치료를 부탁할 수 있대.”
정라엘은 그를 바라봤다.
‘제이 신의를 안다니... 하.’
그녀는 붉은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며 비웃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이정아가 방금까지의 자애로운 표정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라엘아, 네가 안 실장님이랑 하룻밤만 자면 아름이를 살릴 수 있어.”
‘엄마라는 사람이 딸더러 남자랑 자라고 시켜? 겨우 정아름 치료 받자고?’
그제야 정라엘은 그녀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깨달았다.
그 순간 몸이 축 늘어지며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너무 덥고 정신이 아찔했다.
정라엘은 곧 깨달았다. 정성훈이 자신에게 남겨준 술에 이정아는 약을 탔다.
‘정말 못 할 짓이 없구나...’
정라엘의 맑은 눈에 어느새 실망으로 가득한 물기가 맺혔다.
‘나는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하는 걸까...?’
이정아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안준휘 쪽을 돌아보았다.
“안 실장님, 잘 부탁드려요.”
안준휘는 들뜬 표정으로 손을 비비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바로 정라엘을 향해 달려들면서 추잡하게 웃었다.
“아가씨, 와봐! 벌써 이렇게 예쁜데 침대에선 또 얼마나 야할까!”
이정아는 자리를 떠났다.
…
이정아가 나가자마자, 안준휘는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약재의 기운에 혼절한 것이다.
하지만 정라엘의 뺨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이정아가 탄 약이 꽤 독했다.
그녀는 허리춤 쪽을 더듬어 은침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큰일 났네. 별장에 둔 침통을 안 가져왔어...’
정라엘은 치솟는 열기를 억지로 참으며 일단 별장 안쪽으로 달려갔다. 이 집을 떠난 후로 다시 온 적이 없는 곳이다.
주방이며 안방이며 뒤져 봤지만 은침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가정부가 치우며 버린 듯했다.
원래 술을 잘 못 마시는 그녀는 지참금의 뒤늦은 취기가 올라오자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뜨거워 견디기 힘들었다. 억지로 붙들고 있던 이성도 뜨거운 열기에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무겁게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돌아온 것이다.
‘강기준인가...?’
정라엘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문이 열리는 순간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가녀린 몸이 그대로 상대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