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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장 빨리 꺼져

본가를 떠날 때, 배형서와 김현영 일가는 아직 집에 남아 있었다. 배성후는 우리에게 먼저 떠나라고 했고 유시은은 그의 집에 머물게 했으며 다른 일들은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했다. 나도 사실 이 사람들이 싸우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결정을 내렸으니 이 문제는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었다. 차에 앉아 있을 때, 배진욱이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채영이네 집으로 돌아갈 거야?” “집에 가자.” 그를 보고 싶지 않아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배진욱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집으로 가자. 우리 집으로 가는 게 그래도 좋지!” 가는 내내 그는 끊임없이 대화거리를 찾았지만 나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배진욱은 할아버지와 내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는 조금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도 더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너무 지쳐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강희주, 네가 나 미워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제발 부탁이야,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우리 이혼하지 말자. 그냥 이혼만 안 하는 거고 넌 하고 싶은 대로 해. 응?” 그가 내 귀에 대고 쉴 새 없이 떠드니 나는 정말이지 짜증이 났다. “응. 이혼하지 말자.” “뭐라고?” “이혼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 내가 무표정하게 바라보자 배진욱은 곧바로 벌떡 일어났다. “여보, 나 믿어줘. 내가 잘할게. 우리 다시는 싸우지 말자. 기회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는 나를 껴안고 강하게 입을 맞춘 후, 재빨리 주머니를 뒤져 우리의 결혼반지를 꺼냈다. “여보, 우리가 이혼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이제 이거...” 하지만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반지를 다시 끼웠다. “이제 됐어?” 배진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제야 침실로 가서 잠옷을 찾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촉감이 느껴져 결혼반지를 살펴보니 이미 크기가 한 치수 작게 수정되어 있었다. 나에게 딱 맞았다. 언제나 이런 세세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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