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김소정은 시선을 피하며 방금 깨어난 척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정지헌은 덤덤히 말했다.
“깨어났으면 아침 먹어.”
“안 먹고 싶어요.”
“안 먹고 싶어도 먹어야 해.”
남자는 그녀의 곁에 서서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내가 일으켜줘야겠어?”
김소정은 눈을 흘긴 뒤 느직느직 일어났다.
식탁 앞에서 이선화는 정지헌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주말인데 할 일 없지? 소정이 데리고 놀다 와.”
“시간 없어요.”
정지헌은 단호히 거절했다.
김소정은 시선을 내려뜨렸다. 시간이 없는 게 당연했다. 신지수와 데이트를 해야 할 테니 말이다.
이선화는 미간을 구기며 정지헌에게 면박을 주려고 했는데 김소정이 서둘러 말했다.
“괜찮아요. 저 오늘 친구랑 쇼핑하려고 했거든요.”
이선화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그녀는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번에 친구 데리고 올래? 우리 시현이가 아직 여자 친구가 없거든...”
“그건 절대 안 돼요.”
장수미가 같잖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시현이는 부잣집 딸이랑 만날 거예요. 어디서 구르다가 왔는지도 모를 여자를 만나면 안 돼요.”
김소정은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장수미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제 친구도 남자 친구를 사귈 때 미래 시어머니의 인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시숙모님 같은 분은... 제 친구가 고려해보려고 할 일이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장수미는 눈을 부릅떴다.
“너 그게 무슨 말이니? 지금 내가 인성이 나쁘다고 비꼬는 거야?”
“그만해. 어른이면 어른답게 굴어.”
이선화는 장수미를 혼냈고 장수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김소정은 시선을 내려뜨리고 아침을 먹었는데 자꾸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정지헌은 느긋하게 신문을 읽고 있을 뿐, 그녀를 보지 않고 있었다.
설마 착각인 걸까?
김소정은 이런 식사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급하게 몇 술 뜨고는 곧바로 외출했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고 강다은과 약속을 잡은 것은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강다은은 만나자마자 그녀에게 종이백을 건넸다.
“생일 축하해.”
김소정은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사실 선물 안 줘도 괜찮은데. 매년 같이 생일 보내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워.”
김소정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뭐야. 생일 선물 안 챙겨주면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선물은 치마였다. 강다은은 화장실에 가서 입어 보라고 했다.
김소정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강다은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진짜 너무 예쁘다. 너한테 찰떡이야.”
그것은 핑크색 니트 원피스였는데 몸매가 부각됐다.
김소정은 피부가 하얘서 핑크색을 입으니 피부가 더욱 투명해 보이고 아주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다.
“나 안목 높지?”
강다은은 김소정에게 버블티를 한 잔 건넸고 두 사람을 팔짱을 낀 채로 식사할 곳을 찾았다.
그러다 누군가와 갑자기 부딪치게 된 김소정은 버블티를 쏟게 되었고 그 바람에 상대의 옷에 버블티가 튀었다.
“눈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예요?”
상대는 씩씩거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익숙한 목소리여서 고개를 들었더니 정말로 신지수였다.
그녀는 흰색 스팽글 치마에 여우 털 숄을 두르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부잣집 딸 같아 보였다.
그러나 치마에 버블티가 튀어버린 것이다. 주여정은 서둘러 티슈로 신지수의 옷을 닦아주었고 신지수는 혐오스럽다는 듯 그녀를 밀어냈다.
신지수는 김소정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누군가 했더니 남의 남자를 빼앗아 간 그 천박한 여자네요. 김소정 씨, 정말 뻔뻔하네요!”
“저기요, 지금 누굴 욕하는 거예요? 그쪽이 와서 부딪혀놓고 왜 남 탓을 해요? 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 소정이를 욕하냐고요?”
“이 여자는 원래 천박한 여자잖아요. 비열한 수단으로 남의 남자를 빼앗아 간 천박한 종자라고요!”
신지수는 눈을 부릅뜨고 김소정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강다은은 코웃음을 쳤다.
“아, 소정이가 그쪽 남자를 빼앗았다는 거예요? 쯧쯧, 자기 매력이 부족해서 남자 마음을 잡지 못한 거면서 왜 그래요?”
“당신!”
신지수는 화가 나서 손을 들어 강다은의 뺨을 때리려고 했고, 김소정은 서둘러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경악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여정이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서 지수 아가씨께 사과해. 그러면 그냥 넘어갈게.”
“아줌마!”
강다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여정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와서 부딪친 거잖아요. 심지어 이쪽이 먼저 소정이를 욕했어요. 그런데 왜 우리가 사과해야 하는 거예요? 아줌마가 이 여자 집안의 도우미라서,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주여정은 강다은을 무시하고 김소정만 노려봤다.
“사과할 거야, 말 거야?”
김소정은 입을 꾹 다물고 주여정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 시선에 주여정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이때 정지헌이 다가왔다.
정지헌은 신지수의 곁에 서더니 냉담하게 김소정을 무시했다. 그러나 그녀의 우월한 몸매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어떻게 된 거예요?”
신지수는 조금 전까지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굴다가 갑자기 연약한 척했다.
“소정 씨 버블티가 갑자기 저한테 튀었어요. 그래서 지헌 씨가 선물로 준 치마가 더럽혀졌어요. 소정 씨 탓은 하지 말아요. 소정 씨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강다은은 그녀의 연기를 보자 구역질이 났다.
정지헌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겨우 치마 한 벌일 뿐인데 괜찮아요. 다시 하나 사줄게요.”
“그래도 이건 지헌 씨가 사준 생일 선물이잖아요. 조심성이 없어서 미안해요.”
김소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신지수도 오늘 생일이라는 걸 잊을 뻔했다.
주여정은 김소정의 팔을 흔들었다.
“얼른 지수 아가씨께 사과해. 지수 아가씨 오늘 생일이라서 기분이 좋으셔. 널 탓하지 않을 거야.”
김소정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주먹을 꽉 쥐었다.
정지헌은 그녀의 모습에서 익숙하게 느껴지는 고집스러움을 보았다.
정지헌은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상하게 부서뜨리고 싶었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싸늘한 그의 눈동자에 흥미로움이 드리워졌다.
“지수 씨에게 사과해.”
그는 김소정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김소정은 몸을 흠칫 떨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억울함이 마음속을 꽉 채웠다.
그녀는 입술만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지헌은 김소정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음산한 눈빛으로 말했다.
“지수 씨에게 사과하라고 했어.”
그의 평온한 어조에서는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김소정은 눈시울이 빨개진 채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정지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고집을 부릴수록 정지헌은 그녀를 더 망가뜨리고 싶었다.
정지헌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위험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
주여정이 김소정을 붙잡고 말했다.
“어서 지수 아가씨에게 사과하라니까. 사과 한마디 한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됐어요, 아줌마.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닐 텐데 강요하지 말자고요.”
“미안해요.”
신지수의 연기를 하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김소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비록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사실 주먹을 너무 꽉 쥔 탓에 손바닥에 피가 날 정도였다.
강다은은 분통이 터지고 또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비록 정지헌이 두려웠지만 결국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돈이 많으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어도 되는 거예요? 생일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에요? 우리 소정이도 오늘 생일인데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우리 소정이를 괴롭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