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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김소정은 미간을 구겼다. 아주 눈에 익은 차였다. 정씨 일가 마당에도 그런 차가 한 대 있었다. 그러나 비슷한 차량은 많았고 그 짜증 나는 정지헌일리는 없었다. 차가 오자 현장 사람들은 곧바로 그 차를 향해 허리를 굽신거렸다. 김소정은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차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새로 온 사장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가가서 자세히 차 안을 살펴보며 잘 보이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차창에 가까이 다가가도 차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차 안에서는 그녀가 똑똑히 보였다. 정지헌은 시선을 들어 올리더니 창밖의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천박한 여자라서 그런지 노예근성은 절대 고치지 못했다. 김소정이 차로 가까이 다가가자 문가에 있던 사람이 경멸 가득한 어조로 말하며 그녀를 잡아당겼다. “뭐 해요? 우리 새로운 대표님 길 막지 말아요. 얼른 나가요...” 정말로 새로 온 대표라니! 차는 이미 현장으로 들어갔다. 김소정은 자신을 잡아당기는 사람을 뿌리치고 무작정 차를 쫓아갔다. 백미러를 본 양지민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차를 세울까요?” 정지헌은 하트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면서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잘리고 싶으면 세워.” 양지민은 혀를 찼다. 그는 물은 적 없는 걸로 치기로 했다. 그러다 갑자기 깜짝 놀라며 말했다. “대표님, 김소정 씨께서 넘어지셨습니다.” 정지헌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많이 다쳤어?” 양지민은 다시 백미러를 보았다. “심하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아요. 문가에 있던 사람이 소정 씨를 쫓아냈습니다.” 정지헌은 하트 목걸이를 챙긴 뒤 무미건조한 어조로 냉담히 말했다. “운전에 집중해. 불필요한 사람 신경 쓰지 말고.” 양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그의 아내가 어떻게 불필요한 사람이란 말인가? “대표님, 시찰하러 오셨습니까?” 정지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서 긴 손가락으로 책상 끄트머리를 두드렸다. 그의 행동에 다들 당황했다. 담당자 또한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했다. 갑자기 직원이 그의 앞에 서류를 내려놓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대표님, 이건 전의 시공 평면도와 주요 위험 공사에 대한 특별 계획 방안입니다. 확인해 보세요. 사실 다른 계획에는 문제가 없지만 당시 김광호 씨가 소홀하여 안전 조치를 확실히 하지 않은 탓에 사고가 발생했던 겁니다.” 이미 몇 달이나 지난 일인데 정지헌이 갑자기 자료를 가져오라고 하자 그들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정지헌은 양지민에게 서류를 챙기라고 한 뒤 갑자기 문 앞에서 김소정을 잡아당겼던 사람을 보며 말했다. “아까 문 앞에 있던 그 여자는 왜 온 거예요?” 남자는 당황하더니 황급히 대답했다. “우리 공사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양지민은 놀란 표정으로 정지헌을 바라보았다. 정지헌은 피식 웃더니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고용하지 않았어요? 우리 공사장에 여자 직원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표님, 대표님은 모르시겠지만 사실 그 여자는 김광호 씨 딸입니다. 김광호 씨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저희가 왜 그 사람 딸을 고용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자가 워낙 고집도 세고 멍청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자격증을 따면 고민해 보겠다고 대충 둘러댔는데 정말로 자격증을 땄더라고요. 그냥 둘러댄 건데 그걸 진심으로 여기다니, 정말 멍청하지 않습니까?” 정지헌은 자세를 바로 하면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직급이 어떻게 되죠?”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전전긍긍해서 말했다. “전 이 프로젝트의 차장입니다.” “그래요. 앞으로는 그쪽이 팀장이에요.” 양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김소정을 난처하게 하는 사람을 승진시키다니, 김소정을 얼마나 싫어하는 걸까? 김소정은 무릎이 까져서 계속 피를 흘렸다. 그런데 두려운 건 갑자기 배가 쿡쿡 쑤시듯 아프다는 점이었다.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아팠다. 그녀는 심하게 넘어졌다는 걸 직감하고는 길가로 나가서 택시를 탔다. 그녀는 병원에 가봐야 했다. 병원에 도착한 뒤 의사는 우선 그녀의 무릎부터 치료해 주었다. 김소정은 의사에게 복부가 아프다고 말했고 의사는 그녀에게 이상한 질문을 했다. 결혼은 했는지, 최근 성생활을 했는지, 생리는 제때 했는지 등 질문들을 말이다. 김소정은 곧이곧대로 대답했고 의사는 그녀에게 초음파를 찍어보라고 했다. 초음파 결과를 본 김소정은 당황했다. 초음파를 본 결과 그녀는 임신했다. 정지헌의 경고를 떠올린 김소정은 온몸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의사를 향해 말했다. “전 이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의사는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 “아이는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에요. 일단 돌아가서 며칠 고민해 봐요. 배가 아픈 걸 봐서는 유산할 징조 같은데 아이를 지킬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어요.” 김소정은 입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그녀에게 약을 처방해 주었다. 김소정은 넋이 나간 채로 병원에서 나왔다. 눈 부신 빛 때문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기둥에 기댄 채로 평평한 배를 만지며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정지헌이 그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절대 아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이때 갑자기 주여정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주여정은 자신이 아프다면서 아주 강경한 태도로 엄숙하게 당장 돌아오라고 했다. 결국 김소정은 어쩔 수 없이 절뚝대면서 먼 곳에 있는 길가로 향해서 택시를 잡았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따귀가 날아왔다. 김소정은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엄마의 벌게진 눈을 바라보았다. “엄마, 왜 그래요?”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한테는 다른 사람 결혼에 끼어드는 천박한 딸은 없다.” 엄마의 욕을 들은 김소정은 마음이 차게 식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숨을 들이마신 뒤 물었다. “제가 다른 사람 결혼에 끼어들었다뇨?” “그런 적 없다고? 지헌 도련님이랑 지수 아가씨 곧 결혼할 사이였잖아. 그런데 네가 뻔뻔하게 지헌 도련님을 지수 아가씨 곁에서 빼앗아 갔지. 3년이라니. 여자에게 3년이 몇 번이나 있다고. 지수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 기다려?” 그 말을 들은 김소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정지헌이 신지수에게 3년의 약속을 얘기하고 신지수가 그 원망을 그녀의 엄마에게 쏟아낸 듯했다. 주여정은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김소정을 밀었다. “너 무슨 수단을 쓴 거야? 식물인간이랑 결혼한 거 아니었어? 왜 그 상대가 지헌 도련님이 된 거야? 그것 때문에 지수 아가씨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아? 그런 짓을 할 거면 나가 죽어!” 김소정은 나무문에 몸이 부딪쳤다. 그녀는 두 주먹을 움켜쥐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내가 신지수 씨를 죽이기라도 했어요? 내가 뭘 어쨌다고 엄마 딸보고 나가 죽으라는 거예요?” “네가 지수 아가씨 남자를 빼앗았잖아! 그러니까 죽어야지!” 주여정은 씩씩대며 고함을 질렀다. 김소정은 웃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우는 것보다도 더 못났다. “이젠 누가 엄마 딸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네요.” 주여정의 표정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소리를 질러댔다. “네 잘못 맞잖아. 내가 경고했었지. 그런데도 지수 아가씨에게서 지헌 도련님을 빼앗아? 네가 지수 아가씨보다 나은 점이 뭐가 있어? 네가 비열한 수단을 쓰지 않았더라면 지헌 도련님이 왜 너랑 결혼하겠어?” “비열한 수단이요?” 김소정은 웃으면서 고개를 젓더니 조롱 조로 말했다. “제가 정지헌 씨와 결혼하고 이혼도 못 하게 된 건 엄마 덕분이에요.” 주여정은 미간을 구겼다. “그게 무슨 말이니?” 김소정은 정지헌과 결혼하게 된 과정을 서술했고 주여정은 그제야 경위를 깨닫고 가슴팍을 치면서 죽도록 후회했다. 김소정은 비참한 기분으로 후회하는 주여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가 정지헌 씨보다는 식물인간이랑 결혼하길 바라셨나 봐요?” “뭐라고? 지헌 도련님은 원래 지수 아가씨 거였어!” 주여정은 김소정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김소정을 잡아당기며 밖으로 걸어갔다. “지금 당장 정씨 일가를 찾아가서 계약을 파기해야겠어. 그러면 넌 지헌 도련님이랑 이혼할 수 있고 지헌 도련님은 지수 아가씨랑 결혼할 수 있어.” 주여정은 김소정이 절뚝거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어쩌면 신지수만 생각하느라 그녀의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걸지도 몰랐다. 두 모녀는 곧 정씨 일가에 도착했다. 이선화는 그들을 잘 대접해 주었고 집사에게 그들을 맞이해라고 했다. 그러나 정씨 일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주여정은 이선화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비굴한 모습에 장수미와 장아진은 그녀를 마음껏 비웃었다. 정지헌도 그 자리에 있었다. 정지헌은 소파에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는 냉담한 눈빛으로 두 모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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