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살얼음을 걷듯
그날 밤, 나는 기분이 유난히 좋았다.
아빠는 대화를 나누던 중 일주일 뒤면 수능 성적이 나올 텐데 자신 있냐고 물었다.
나는 일부러 말을 돌렸다.
“아빠, 내가 시험 잘 보면 엄마한테 다시 청혼하는 건 어때요? 엄마, 내가 몇 점 맞아야 아빠랑 다시 결혼할 거예요:”
역시 서경시의 일인자답게 엄마의 대답은 물 샐 틈이 없었다.
“그건 네 인생이지.”
내가 몇 점을 받든 두 사람의 재혼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턱을 치켜들었다.
“몰라요, 다 1등급으로 받으면 두 분 재혼해요. 망설이지 마시고요. 물론 1등급 아래면 앞으로 입 다물고 다시는 얘기 안 꺼낼게요.”
아빠가 가장 먼저 나서서 반대했다.
“안 돼, 만약 너 시험 망치면….”
“좋아!”
엄마는 눈을 흘겼다.
“우리 딸 말대로 해.”
이건 평소 고작 3등급 정도에서 머무르는 내가 시험을 잘 봤을 리 없다고 확신한 듯 햇다.
나는 아빠를 향해 눈을 찡끗했지만 아빠는 곧 울 기세였다.
혹시라도 재혼을 하지 못할까 봐 도대체 시험 어떻게 봤냐고 계속해서 물었다.
“일주일 뒤엔 알게 될 거예요.”
비록 아빠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임유민만 떠올리면 나는 속이 불편했다. 만약 그 두 모녀만 아니었으면 부모님은 이혼할 일도 없었다.
지난 생의 나도 그렇게 비참할 리가 없었다. 감히 내 필체를 따라 해서 나를 모함하다니, 두고 보라지!
나는 아빠 휴대폰을 가져왔다.
다른 건 빼고 일가족 셋이 손을 잡고 함께 사진을 찍은 나는 그대로 SNS에 올렸다.
‘일가족이 함께하는 행복한 순간’이라는 글과 함께 게시했다.
임유민 모녀 분명 화가 머리끝까지 나겠지.
이번 출장지는 강해시이었다. 현지 조사와 제품 이해 외에도 양측은 계약에 관한 협상을 진행해야 해 약 출장 기간은 약 사흘이었다.
기분이 좋으니 잠도 솔솔 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아침에 출발하기 전, 나는 엄마에게 미리 이야기를 한 뒤 허리 라인을 잡아주는 붉은색 나시 원피를 입고 핑크핑크한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섰다.
택시를 잡기도 전에 앞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배님~”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길 건너 오동나무 아래에 멈춰 선 볼보가 보였다.
운전기사는 바로 허 비서였다.
그는 차에서 내린 뒤 나에게 손을 흔들며 앞좌석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짙은 선팅 너머로 언뜻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보였다. 보지 않아도 성영준일 게 분명했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눈앞에 있는데 앞좌석에 앉을 리가 없었다.
“선배님, 좀 부탁할게요. 수고요.”
나는 캐리어를 허 비서에게 맡긴 뒤 그대로 뒷좌석에 앉았다.
그제서야 성영준이 오늘은 흰 셔츠 차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아마 피곤한 건지, 노트북을 아무렇게나 옆으로 내려놓은 그는 한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누르며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두 눈을 꼭 감고 쉬고 있는 모습은 은근한 날티가 드러났다.
나는 성영준의 휴식에 방해가 될까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차에 탄 허 비서는 나에게 아침을 건넸다.
고개를 숙여 보니 손아정의 게살 만두였다.
그것도 따끈따끈한 것.
지난 생에 성지태와 결혼을 하고 거식증에 걸렸을 당시 내가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거였다.
“어머 어머, 선배님. 정말 고마워요. 진짜 좋은 사람이시네요!!”
나는 딱히 거절할 것 없이 다람쥐처럼 곧바로 게살 만두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가 부르게 먹으니 배가 통통하게 나와서는 졸리기 시작했다.
차창에 기대잔다면 불편할 게 분명했다.
두 눈을 데구르르 굴린 나는 잠든 척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성영준을 향해 다가갔다.
히히, 아마 잠이든 듯 가까이 다가가는 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나는 천천히 그의 어깨에 기대 있다가 끝내는 다리 위에 누웠다.
서경시에서 강해시까지는 차로 세 시간 정도 걸렸다.
잠기운에 잠겨 있던 중에 지난 생에 겪었던 일들이 마치 늪처럼 머릿속에 마구 몰려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꿈에서 성지태가 나의 앞에서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추는 걸 본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분명 이를 악물면서 외쳤는데 입 밖으로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성지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 말이 나오자마자 머리 위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자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성영준의 차갑게 굳은 얼굴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