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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그녀의 걸음은 천천히 멈추었지만 맞은 편의 사람을 도무지 마주할 수가 없었다. 박태오가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건 줄 알고 아는 체를 못 했는데 진짜로 너였구나, 수지야.” 그녀는 폐지를 줍고 있었다. 게다가 익숙해 보이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수지야…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야.” 박태오가 물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니?” 한때 그토록 밝고 명랑했던 여자애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했고 매너 있는 그의 꿈속의 이상형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게는 지침과 고난만 가득했다. “사람 잘못 봤어요.” 강수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너 맞아. 불타 재가 된다고 해도 난 널 알아볼 수 있어!” 강수지는 비웃음을 흘리며 휙 하고 등을 돌렸다. “맞아요. 저 강수지예요. 한때 당신의 약혼녀였던 강수지라고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니까 서로 알아서 갈 길 가죠!” 한때 박태오는 강수지와 혼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강씨 가문에 일이 생긴 뒤 박씨 가문에서는 일방적으로 혼약을 해제했고 완전히 관계를 끊기 위해 빠르게 박태오를 해외로 보내버렸다. 그 시기는 강수지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나날이었다. 감옥, 병원, 경찰서를 오가던 그녀에게는 한 사람의 도움이 몹시도 절실했었다. 그 사람은, 아마도 박태오였을 것이다. 하지만 박태오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박씨 가문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던 데다 경비는 그녀를 밀치며 내쫓았다. 모두가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다. “아니야, 수지야. 내 말 좀 들어 봐.” 박태오는 강수지의 어깨를 꽉 잡았다. “출국은 아버지가 내린 결정이었어. 나에게 좀 더 단련을 하고 사업에 성공한 다음에 다시 너와 결혼을 하면 너에게 더 좋은 생활을 줄 수 있다고 해서 출국에 동의한 거였어!” “출국하면 전화 한 번 못 받나요? 완전히 증발한 것처럼? 저한테 말 한마디 할 시간도 없었나요?” “그때는 상황이…” “됐어요.” 강수지가 그의 말을 잘랐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이미 지나간 일들이에요.” 박태오에게 일찍이 완전히 실망했던 터라 강수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렸다. “수지야!” “따라오지 마요!” 강수지가 고함을 질렀다. “지금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에요!” 박태오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강수지를 쳐다만 봤다. “대표님, 곧 있으면 이 대표님과의 약속 시간입니다.” 비서가 옆에서 재촉했다. “그래. 넌 가서 강수지가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자세히 알아봐.” “네, 대표님.” 강수지가 이씨 그룹에 도착하자마자 범지훈이 그녀를 찾았다. “사모님, 드디어 오셨네요. 대표님께서 찾으십니다.” “금방 갈게요.” 대표이사 사무실, 이변섭은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그녀를 훑어봤다. 강수지는 이변섭의 눈빛에 조금 불편해졌다. “왜 그래요….” “옷 벗어.” 강수지는 깜짝 놀랐다. “뭐… 뭐라고요?” “다시 말해줘? 아님 내가 직접 벗겨줘?” 이변섭이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입술을 깨문 강수지는 단추를 풀더니 천천히 윗옷을 벗었다. “뒤돌아.” 그녀는 시키는 대로 했다. 하얀 등에는 기다란 상처가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이어져 있어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꼭 굳이 이런 고생을 해야 해?” 다가온 이변섭은 얇게 굳은 살이 박힌 손가락으로 상처 주변을 매만졌다. “너란 여자는 뭐가 좋고 나쁜지 분간이 안 가나?” “모욕은 죽기보다 참기 힘든 거죠.” “기개가 대단하군.” 그는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는 버텼지만, 다음엔?” 강수지가 대답했다. “이변섭 씨, 제 몸을 학대하는 것보다 당신은 제 존엄과 자랑들을 전부 발밑에 밟고 싶은 거겠죠….” “맞아! 정신적인 학대야말로 진정한 괴로움이지!” 이변섭이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어 이제 막 딱지가 앉은 상처에 찔러넣었다. 느껴지는 고통에 강수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괜히 유미나 건드리지 마. 무슨 말을 하든 얌전히 들어.” 이변섭이 경고했다. “알아들었어?” “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약속했던 클라이언트께서 오셨습니다.” “들여보내.” 그는 옷을 집어 강수지의 얼굴로 던졌다. “들어가서 입고 나와.” 그녀는 황급히 휴게실로 들어갔다. 이곳은 사무실과 이어진 개인 공간으로 몹시 은밀했고 있을 건 전부 다 있었다. 주변을 뒤적이던 강수지는 의료 상자를 발견하고는 속으로 기뻐했다. 이제 돈을 들이지 않고 약을 바를 수 있었다. 밖, 이변섭이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있자, 박태오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박태오가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이번 협력을 위해 저희는 최대의 정성을 가져왔습니다.” “앉으시죠.” 이씨 그룹은 보유하고 있는 산업이 아주 많았고 주얼리는 그중 하나의 기둥 사업으로 매년 이씨 그룹을 위해 수조의 이윤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보석 원료는 전부 이씨 그룹이 공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변섭은 주얼리 원료 공급뿐만 아니라, 주얼리 브랜드를 설립해 직접 소비자와 직면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씨 그룹은 유명한 주얼리 브랜드인 판띠런을 소유하고 있었다. 박태오는 디자인 원고를 하나 꺼냈다. “이 대표님께서는 본인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을 이용해 주얼리 브랜드를 설립하고 싶어 하시죠.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최고의 주얼리 디자이너가 필요할 겁니다. 이건 ‘판띠런의 매년 판매량이 가장 좋은 쥬얼리 디자인입니다. 확인해 보시죠.” 그는 이변섭과 협력하고 싶었다. 그는 디자인과 브랜드 영향력을 제공하고 이변섭은 자원, 미디어 가치 그리고 주얼리 원료의 공급을 제공하는 것이다. 모두가 이씨 그룹과 협력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일단 손만 잡으면 이윤이 배가 될 것은 분명했다! 박태오는 이제 막 귀국해 박경 그룹을 인수받은 터라 이번 일로 성적을 내 아버지와 이사회의 인정을 받으려 했다. 이변섭이 원고를 건네받았다. 조용한 사무실 안에는 오직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휴게실 안, 약을 다 바른 강수지는 의료 상자를 들어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데 손이 미끄러지더니 상자가 떨어졌다. “쿵!” 물건들이 바닥에 흐트러졌다. 너무 큰 소리라 박태오도 들었다. 하지만 이변섭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주얼리 디자인 원고를 확인했다. “대표님.” 박태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 소리… 무슨 소립니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쥐가 있어서.” 순간 멈칫한 강수지는 재빨리 쭈그려 앉아 정리를 시작하며 또다시 부스럭대는 소리를 냈다. “쥐가 좀 요란이네요.” 박태오가 기침했다. “대표님, 쥐잡이를 사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변섭이 눈썹을 까딱했다. “좋은 생각이군요.”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도 전에 강수지는 다시 의료 상자를 제자리에 놓은 뒤 두근대는 심장을 꾹 눌렀다. 그러다 십몇 분을 기다린 끝에 바깥에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나가도 되겠지…”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한번 봐보자.” 강수지는 조용히 입구 쪽으로 다가가 살짝 문을 열고 문틈으로 밖을 쳐다봤다. 이 각도에서는 접견 구역이 보이지 않았다. 문을 조금 더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강수지는 오른쪽을 쳐다봤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색 양복 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이변섭이 보일듯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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