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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고개를 돌리자 비행복 차림의 젊은 남자였고, 피부는 가무잡잡하고 얼굴이 길쭉하고 야위었다. 옆에 같은 제복을 입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는데 디자인이 좀 달랐다. 양쪽 옷깃에 별 모양 자수가 수 놓였고, 가슴에는 훈장이 여러 개 달려 있어 조금 더 높은 계급으로 보였다. 물론 외모는 더 말할 게 없다. 차가운 눈매와 오뚝한 콧날, 살짝 도톰한 입술은 한일자로 꾹 다물었다. 남자다운 얼굴은 윤곽이 뚜렷했고, 준수함 속에 오만방자함이 엿보였다. 게다가 딱 맞는 비행복까지 갖춰 입고 나니 꼬질꼬질한 사람 중에서 유난히 돋보였다. 온서우는 저도 모르게 눈길이 자꾸 갔다. 곧이어 날카로운 시선과 맞닥뜨리자 숨 막히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잘생긴 만큼 성격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듯싶었다. 오후 내내 기차를 탔더니 온서우는 몸이 뻐근했다. 공간이 비좁은 데다가 의자까지 딱딱해서 허리가 아프고 다리도 퉁퉁 부어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일어나서 스트레칭하려고 했다. 엉덩이를 드는 순간 어깨에 걸친 천 가방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가방이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매듭을 풀어서 열어보니 이정선이 챙겨준 군용 수통을 발견했고 물까지 가득 차 있었다. ‘어쩐지 무겁다고 했어.’ 이내 수통을 꺼내 앞좌석 주머니에 꽂아 넣고 가방을 메고는 자리를 비웠다. 한편, 멀어져가는 가녀린 뒷모습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는데 남자가 피식 웃으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대대장님, 꽤 똑 부러진 여자네요? 군악대 특채 제안에도 꿈쩍하지 않는다니. 행여나 사기를 당해 돈도 순결도 잃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정서준은 꼿꼿이 앉아 남자를 흘긋 쳐다보았다. “생각만 하지 말고 미인을 구해주지 그랬어?” 젊은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가 도와주기 전에 본인이 먼저 간파하고 거절했잖아요. 그나저나 저 여자가 미인인 건 아시네요? 대대장님은 외모에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헤실거리며 웃었다. “대대장님과 방금 본 여자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잘생긴 아빠와 예쁜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봐요.” 남자가 부추기며 말했다. 정서준이 정색하며 눈썹을 치켜뜨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민재, 오지랖이 이렇게 넓은 줄 몰랐네? 혹시 많이 한가해? 기지에 복귀하면 훈련량 좀 늘려줘?” 성까지 붙여서 이름을 부르다니. 등골이 오싹한 손민재는 서둘러 꼬리를 내렸다. “아닙니다. 지금도 충분한데 무슨 소리입니까? 이게 다 대대장님 걱정해서 하는 소리잖아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아시죠? 언제 적의 공격을 당해 죽을지도 모르는데 적어도 후손은 남겨야죠. 이번에도 대대장님께서 제때 전투기를 포기하고 긴급 착륙하지 않았더라면...” 손민재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정서준은 뻔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구사일생했지만 다음번에는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어쨌거나 행운이 매번 따라다닌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분위기가 금세 가라앉기 시작했다. 손민재가 손을 들어 자기 입을 찰싹 때렸다. “이 조동아리가 방정이라니까. 그나저나 교관님이 말씀하길 대대장님의 개인 사정은 이제 중요한 임무로 간주되어 올해 중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네요. 공군 군악대 간판 단원도 관심이 없고 아까 그 여자도 마음에 안 들면 대체 어떤 사람이 대대장님 스타일인지 궁금하네요.” 조금 전 울적했던 분위는 마치 착각인 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정서준은 손을 뻗어 옷소매를 정리하고 무심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한가한 게 맞네.” 열차 객실의 연결 통로. 한숨 돌린 온서우는 가방을 메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잘생긴 비행사의 위압적인 눈빛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라 이번에는 지레 꼬리를 내리고 앞만 보고 지나갔다.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를 발견한 손민재는 팔꿈치로 정서준을 툭툭 건드렸다. “대대장님, 저 여자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아요.” 정서준은 그를 무시했다. 이때, 손민재가 제멋대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 봐요. 공군 군악대 여단원들은 대대장님을 볼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저분은 안중에도 없잖아요. 너무 신선하지 않아요?” “닥쳐.” 옆에서 조잘거리는 손민재 때문에 짜증이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대장님? 어디 가세요?” 손민재가 물었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온서우는 자리로 돌아왔다. 아까 맞은편에 앉았던 안경 남이 사라지고 아주머니가 자리를 대신했다. 그녀는 딱히 신경은 쓰지 않았고, 목이 마른 느낌에 입술을 살짝 축였다. 이내 수통을 꺼내 뚜껑을 열어 물을 따라 한 모금씩 마셨다. 기차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할수록 공기와 습도가 현저히 낮아졌다. 온서우는 물을 마실수록 갈증을 느꼈다. 결국 저도 모르게 벌써 절반이나 마셔버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에 있는 수통이 갑자기 2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침침해지기라도 한 걸까? 비몽사몽 하는 그녀를 보자 맞은편의 아주머니가 손을 내밀어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가더니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가씨.” 온서우의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렸고, 물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곧이어 이빨로 혀끝을 꽉 깨물었고 피비린내가 입안에 진동하자 금세 정신이 맑아졌다. 아주머니는 통로 쪽에 앉아 길을 막고 그녀의 팔을 꽉 붙잡고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온서우는 벌떡 일어나 옆에 있는 아주머니를 밀치고 입을 벙긋하더니 본능적으로 살려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우렁찬 남자 목소리에 묻히게 되었다. “여보, 이제 그만 화 풀어!” 안경 남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온서우의 팔을 붙잡고 친한 척했다. 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잽싸게 한마디 보탰다. “언니, 그래도 부부인데 서로 잘 얘기해 봐요. 걸핏하면 가출하지 말고. 오빠랑 얼른 집에 가요.” 그녀는 방금 안경 남을 에워싸고 질문 공세를 펼치던 여자 중 한 명이었다. “맞아! 할 말 있으면 집에 가서 해. 괜히 밖에서 소란 피우면 되겠어?”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세 사람은 온서우를 빈틈없이 둘러쌌다. 그리고 억지로 끌고 객실 출구로 걸어갔다. 열차 승무원이 방송으로 다음 역에 곧 도착할 거라고 안내했다. 승객들이 내릴 준비 하면서 크고 작은 가방을 끌고 출구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곧이어 객실 안이 시끌벅적하며 어수선했다. 소동을 눈치챈 주변 승객은 단지 일가족의 갈등으로 여겼다. 온서우는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외쳤다. “살려주세요! 부녀자를 유괴하는 인신매매범 패거리들이에요! 저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죠.” 사방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졌고, 무슨 상황인지 다가가서 직접 물어보는 사람도 있지만 안경 남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아내가 저한테 화가 많이 났나 봐요.” 아주머니도 질세라 말을 보탰다. “맞아요. 둘이 사랑싸움하는 거예요. 인신매매범은 무슨, 열차에서 대놓고 사람을 유괴하는 범죄자가 어디 있어요?” “아니에요!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다들 한 패거리니까 얼른 경찰에 신고해 주세요.” 온서우가 큰 소리로 반박했다. 하지만 중독되어 목소리에 힘이 없었고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 금세 묻혔다. 도와주려고 나섰던 사람들은 망설이기 시작했고, 대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체내의 기운이 급속도로 빠졌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객실 출구까지 불과 2m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1m... 조금만 더 가면 온서우는 떠밀려 열차에서 내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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