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이제 길 잃을 일 없겠지?” 유리창 밖으로 김신걸의 악마 같은 얼굴이 보였다.
“안 돼…… 난 죽을 수 없어.”원유희는 유리창에 바짝 달라붙어 문틈 사이로 나오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했다.
“제발 풀어줘 난 이대로 죽으면 안 돼. 그냥 내가 네 눈앞에서 사라질게.”그녀의 말은 아무 소용없었다.
김신걸의 눈빛은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것만 같았다.
원유희는 숨쉬기 힘든 듯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만 흘렸다.
“제발 그만, 이제 도망가지 않을게. 살려줘…….”
말을 마친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흐린 시선이었지만 유리창 밖에 있던 긴 그림자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내 아이들. 내가 죽으면 애들은 어떡해.’
“으악!” 원유희는 심연 같은 어둠에서 깨어났다.
겁에 질린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낯익은 천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증기실에서 벗어났구나…….’
원유희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온전한 모습의 자신을 보자 그녀는 안도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죽을 뻔했던 순간이 머릿속에 스치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원유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까지 했다.
‘만약 내가 해산물 알레르기를 일으켰을 때 김신걸이 나를 그대로 방치했다면, 죽일 생각이 있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김신걸은 나를 죽일 생각이 없어. 아니, 적어도 이렇게 빨리 죽이지는 않을 거야.’
사냥감을 잡을 때 목덜미를 물어 한 번에 죽이는 맹수가 있는가 반면에 흥미를 잃을 때까지 가지고 노는 맹수가 있다.
김신걸을 후자에 속한다.
그러나 이번에 증기실에 갇혀 산채로 익어 죽을 뻔했을 때, 그녀는 김신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살인 욕망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무서워…….’
그녀는 여권과 신분증을 찾기 위해 침실을 다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김신걸이 가져갔을 것이다. 여권이 없으면 어떻게 이 나라를 떠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아이들이 엄마를 기다릴 거라는 생각에 눈물을 주르륵 흘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탈출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던 원유희는 다시 지옥의 수렁 속으로 떨어졌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아이들을 만나 그들의 보드라운 볼에 입을 맞추고 귀여운 재롱을 보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원유희는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울었다.
그녀는 밤이 깊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시차 때문에 아이들이 깨어있는 시간에 전화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시각은 새벽 두 시, 아이들이 있는 곳은 오전 10시쯤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잠그고 욕실로 가서 욕실문을 닫았다.
속옷 안에 숨겨둔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켜 영희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영희이모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
“엄마!”
“엄마!”
원유희는 화면 앞으로 달려드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올망졸망한 눈으로 밝게 웃으며 화면을 바라보는 아이들 앞에서 원유희는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엄마 여기 있어! 집에서 영희 할머니 말 잘 듣고 있었어?”
“응!”
“응!”
“응!”
“그럼 됐어…….” 원유희는 핸드폰 화면의 아이들의 얼굴을 매만졌다.
“마마, 살이 빠진 것 같아!” 딸이 가는 목소리로 원유희를 걱정하자 애써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엄마는 살이 빠진 게 아니라 날씬해진 거야!” 큰 목소리에 사내대장부 같은 아들이 원유희의 눈물을 보며 말했다.
원유희는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생각이 깊어졌지, 철이 빨리 드는 것도 좋지 않은데라고 생각했다.
“열 밤 자면 와?” 과묵한 둘째 아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원유희는 엄마와의 생이별을 겪은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지 그 마음이 짐작 갔다. 그녀도 그랬으니까.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후, 그녀는 미소를 방긋 지으며 얼굴을 들었다.
“엄마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좀 걸릴 것 같아. 그것만 끝내면 금방 돌아갈게 알았지?”
“얼마나 더?” 조한이 물었다.
“음……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갈게! 엄마가 시간 날 때마다 이렇게 영상통화를 걸 테니까 영희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엄마…….”조한이 울먹였다.
“착하지, 뚝! 엄마가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갈게~”
아이들이 울먹거리자 원유희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응…….” 유담이도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엄마 매일 전화해!” 조한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응, 최대한 노력해 볼게!” 원유희가 말했다.
“엄마 너무 보고 싶어…….” 상우가 입을 삐죽거렸다.
“엄마도 너희들이 너무 보고 싶어.”그녀는 애써 밝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마음 같아서는 핸드폰 화면으로 들어가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두 살밖에 안된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일 텐데…….
엄마가 걱정할까 봐 엉엉 울지도 않고 눈물을 참는 그녀의 아이들은 또래보다 성숙했다.
유담이는 원유희를 닮았고, 조한이와 상우는 김신걸과 똑같이 생겼다.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 흐뭇하면서도 김신걸이 떠올라 마음이 힘들었다.
‘만약 김신걸이 아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그녀는 김신걸에게 아이들을 빼앗길까 봐 두려웠다.
김신걸은 어쩌다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혈육을 낳도록 했을까…….
전화를 끊고 핸드폰의 영상을 뒤적였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영상, 엄마 사랑한다고 말하는 영상, 점심을 먹으며 엄지를 드는 영상…….
아이가 셋이니 서로 보고 배우는 게 있는지 아이들은 벌써 혼자 밥을 먹을 줄 알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숟가락을 쥐고 반찬까지 야무지게 먹는 아이들을 보니 원유희의 입 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씩 올라가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을 보는 이순간 만큼은 지금까지 있었던 아픔이 싹 사라지는듯했다.
그녀가 정신을 놓고 아이들의 영상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순간 원유희는 석고상처럼 굳었고, 욕실 밖에 누군가 서있었다.
방안에는 전에 없던 한기가 돌았고, 키가 큰 김신걸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가 침실에 없는 걸 보고 그의 시선이 욕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