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그곳에서 나온 뒤 낙청연은 소서를 데리고 저택 안에 있는 인뇌진을 처리하러 갔다. 나침반은 꺼낼 수 없었으나 조상님께서 물려주신 귀한 보물이었기에 그녀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빗줄기는 많이 약해졌고 저택의 사람들은 벼락을 맞아 어지럽혀진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느라 바빴다. 낙청연은 소서를 데리고 저택 이곳저곳을 다녔는데 그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낙월영은 이미 한참 전에 정신을 차렸고 왕야와 낙청연이 서방에 있다는 걸 알고는 감히 그들을 방해하지는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방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낙청연이 서방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야 급히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서방에 도착하니 소유가 그녀를 막아섰다.
“둘째 아씨, 왕야께서는 부상이 심하셔서 지금 쉬고 계십니다.”
낙월영은 당황했다. 왕야의 서방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낙청연이 들어갈 수 있는데 자신은 들어갈 수 없다니, 그녀는 왕야가 정말 자신이 낙월영의 공로를 가르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아씨, 얼른 처소로 돌아가서 쉬시지요.”
소유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일깨웠다.
불현듯 정신이 든 낙월영은 몸을 돌려 떠나려 했는데 소유마저 그녀를 처소까지 모시지 않았다.
낙월영은 굉장히 조바심이 나고 낙청연이 미웠다. 이 모든 게 다 낙청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뇌진은 무슨, 그녀는 낙청연이 얼마나 멍청한지 잘 알고 있었고 그녀가 이런 것들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낙청연을 떠올릴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더는 낙청연을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낙월영은 최대한 빨리 낙청연을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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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청연은 온밤을 바삐 돌아치면서 소서와 함께 인뇌진을 해체했다. 그 물건들은 전부 소서가 챙겨갔고 낙청연은 다시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인뇌진을 해체하기는 했으나 낙청연은 소매 안에 있는 나침반이 여전히 약하게 진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섭정왕부 안에는 여전히 강한 살기가 있었는데 무언가에 의해 억눌러져 있었다.
저택 안에는 분명 풍수지리에 좋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나침반이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일 리도 없었다.
섭정왕부는 너무 컸고 그녀는 소서와 함께 있을 때 나침반을 들고 왕부의 이곳저곳을 살펴볼 수 없었다. 그래서 아직 문제가 무엇인지를 몰랐고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소로 돌아와 보니 지초가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두었다.
“왕비 마마, 오늘 저택에 번개가 쳤다면서요? 괜찮으십니까?”
지초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다.”
낙청연은 고개를 젓더니 지초의 앞에 그릇과 젓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두 사람이 먹을 양을 준비해 두도록 해라. 너도 먹거라.”
지초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더니 한참을 주저하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왜 저를 이토록 챙겨주시는 것입니까? 장미 언니는 제가 제일 멍청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왕비 마마의 눈에 든 것입니까?”
그 말에 낙청연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네가 멍청하다는 그 말을 믿는 것이냐?”
지초는 불안한 얼굴이었고 낙청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 몸은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난 그냥 널 살리고 싶은 것뿐이다. 왕야께 널 내 몸종으로 두겠다고 얘기했단다. 앞으로 너는 내 옆에만 있고 내 말만 들으면 된다. 다른 이가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말거라. 난 널 내치지 않았으니 너도 너 자신을 함부로 낮추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지초는 그녀의 말에 살짝 놀라더니 풀썩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제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믿고 왕비 마마께서 절 이렇게 잘 챙겨주시는 게 어쩌면 다른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용서해주시옵소서, 왕비 마마. 앞으로 왕비 마마께서 하라는 건 다 하겠습니다. 왕비 마마의 말을 모두 따르겠습니다.”
지초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됐다. 그만 일어나거라. 앉아서 밥이나 먹자꾸나.”
낙청연은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지초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조금 뒤 소서가 그녀의 처소로 찾아왔고 문밖에서 말했다.
“왕비 마마, 어떤 약재가 필요하십니까?”
지초는 종이와 필을 가져왔고 낙청연은 약재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꽤 값이 나가는 약재들이었지만 섭정왕부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그것을 소서에게 전해줬고 소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약재를 준비해 약방에 두겠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직접 가지러 가시지요.”
“그래. 앞으로 지초 네가 나 대신 약방에 가서 약재를 가져오도록 하거라.”
소서에게 지초를 소개한 셈이었으니 앞으로 지초가 약방에 간다고 해도 막지 않을 것이다.
소서가 떠나려는데 창밖에 음산한 그림자가 나타났고 지초는 깜짝 놀라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저건 무엇입니까?”
낙청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방문 틈으로 흰옷과 원망스러운 눈초리가 보였다.
지초는 겁을 먹었지만 낙청연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귀신인 척해서 누굴 놀라게 하려고 하는 것이냐?”
낙청연이 자신을 눈치채자 맹금우는 화가 나서 벌컥 문을 열면서 방 안으로 쳐들어왔다. 맹금우는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었고 사나운 기세로 낙청연을 향해 돌진했다.
“내 너를 죽일 것이다. 전부 너 때문이다. 귀신이 되어서도 절대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지초는 겁에 질려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지만 낙청연의 앞을 막아서려 했고 맹금우는 그런 그녀를 있는 힘껏 밀쳤다.
맹금우는 낙청연에게 달려들면서 미친 듯이 낙청연을 공격했고, 낙청연은 억센 힘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서는 그녀를 밀어냈다.
“제 발등을 제가 찍어놓고는 왜 날 탓하는 것이냐? 네가 그런 비열하고 추접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낙청연은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전혀 없는 냉담한 말투로 말했다.
바닥에 밀쳐진 맹금우는 낙청연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울부짖었다.
“왕부에서 몇 년 동안 노력해서 이제 겨우 빛을 볼 뻔했는데, 전부 너 때문이다! 네가 내 인생을 망쳤단 말이다. 절대 널 편히 살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 기세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나 낙청연은 덤덤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너한테는 그럴 만한 능력도 없을 텐데. 너 자신이나 신경 쓰거라.”
맹금우의 얼굴에는 죽음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이미 반쯤 저승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었다. 곧 있으면 죽을 사람이었고 단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뿐이었다.
맹금우는 분통에 찬 얼굴로 벌떡 일어서더니 다시금 낙청연에게 달려들면서 그녀의 목을 조르려 했다. 맹금우는 이미 미쳐있었고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낙청연은 몸이 무거워 제때 피하지 못했고 맹금우와 맞붙을 수밖에 없었다. 안간힘을 써서야 겨우 맹금우를 방 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닫아걸었다. 맹금우는 미친 듯이 방문을 두드렸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자리를 떴다.
지초는 넋이 나가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몸짓이 정말 날쌔시군요.”
그 말에 낙청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게 몸이 날쌘 돼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지초는 화들짝 놀라면서 연신 손을 저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전혀 뚱뚱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놀랄 것 없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도 잘 알고 있으니.”
그녀는 지금 거울을 보기가 싫었다. 맹금우와 한참 동안 씨름해야 할 정도로 몸이 무거웠으니 말이다. 만약 그녀가 몸이 가벼웠더라면 맹금우 따위는 그녀의 옷자락조차 건들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몸을 치료하는 것이었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살진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낙청연의 일생을 다시 자세히 떠올려보았다. 그녀는 어렸을 적 굉장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고 거문고와 바둑, 글과 그림에 전부 능했다. 그래서 성인이 되기도 전에 수많은 귀족 집안에서 그녀와 혼사를 논하려 했었다. 그러나 13살 때 크게 앓고 난 뒤로 갑자기 살이 쪘고 병 때문에 장기적으로 약을 복용하다보니 살이 점점 더 쪘다.
그 뒤로 낙청연은 수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부끄러워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고 그로 인해 열등감이 점점 더 심해졌다.
반대로 낙월영은 낙청연이 못생겨지자 팔자가 피었다. 그녀가 승상부의 서녀(庶女)라는 점만 거론하지 않으면 모두 그녀를 적녀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낙청연이 앓았을 때 먹은 약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것 또한 낙월영이 한 짓일지 몰랐다. 하지만 낙월영은 가식을 잘 떠는 사람이었기에 낙청연은 단 한 번도 낙월영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 몸의 비만증을 치료하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