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성시후는 점점 멍해졌다.
지난번에 강리나가 그렇게 불렀을 때는 2년 전 그 파티에서였다. 그는 하은지와 함께 참석했고, 어렸을 때 자신과 함께 자란 리나가 귀국한 것을 보고 먼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 그녀는 어렸을 때처럼 그녀를 ‘시후 오빠’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후...
그 후 벌어진 일을 생각하자 성시후는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는 강리나를 품에서 끌어내어 거칠게 잡아당겨 위층으로 올라가 안방의 큰 침대에 내동댕이치고는 몸을 돌려 가버렸다.
...
강리나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관자놀이를 누르자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둘씩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성시후에 강요당해 술 한 병을 다 마시고 집에 돌아왔다. 성시후도 돌아온 것을 본 것 같은데...
두 사람이 얘기 좀 한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침실에서 나온 강리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다 소파에 앉아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성시후의 모습에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감정이 격앙되어 소리쳤다.
“뭐라고? 은지가 돌아왔어?”
“...”
“당장 찾아갈게.”
전화를 끊고 성시후는 바로 집을 나섰는데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도 눈치채지 못한듯 했다.
강리나는 자신에게 더는 다른 감정이 없을 줄 알았지만 갑자기 밀려오는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
휴대전화가 윙윙 진동하자 그녀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하은지 씨?”
“저예요.”
하은지가 말했다.
“남편과 관련해서 아직 할 말이 많은데 30분 뒤에 성수 거리 카페에서 만나도 될까요?”
강리나는 현관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성시후가 하은지를 만나러 가지 않았나? 왜 하은지가 만나자고 하는 거지?’
“강 변호사님?”
상대방이 떠보듯 물었다.
정신을 차린 강리나가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네, 이따 봐요.”
...
30분 후.
강리나는 카페 입구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하은지 혼자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고 주위에는 성시후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은지의 맞은편에 앉은 후 강리나는 곧장 주제를 꺼냈다.
“하은지 씨, 제가 생각해 보니 하은지 씨와 남편분 소송까지 가지 말고 화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법정에 서는 것은 하은지 씨에게 승산이 크지 않아요.”
“화해하면 어떻게 빈털터리로 만들 수 있어요? 저는 2년 동안 청춘을 바쳤고, 그 사람을 위해 2년 동안 전업주부로 일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저를 배신하고 손찌검까지 하다니. 설마 저더러 이 화를 삼키라는 거예요?”
“바람이 났든 가정폭력이든 증거가 있어야 해요. 각서라도 썼으면 좋겠는데, 있어요?”
그녀가 따지는듯한 어조로 물었다.
“저를 못 믿는 거예요?”
강리나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내가 하은지 씨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판사가 하은지 씨를 믿을 수 있도록 증거를 확보하는 게 관건이에요.”
하은지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강리나 씨, 솔직히 말해서 강리나 씨가 2년 전에 시후를 꼬시지 않았더라면 저도 홧김에 육민우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강리나는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런 말은 법정에서 해도 소용없어요.”
“...”
“하은지 씨가 자신이 원하는 걸 잘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혼할 때 남편에게 최대한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이의 의뢰 계약을 통해 내가 얼마나 미안한지를 되새기려는 것인지 정확히 생각해 보라고요.”
하은지는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강 변호사님, 말을 참 잘하시네요!”
강리나가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대로 말할 뿐인데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세요.”
이 익숙한 말에 하은지의 얼굴빛을 살짝 변했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강리나 앞에 놓인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