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박태성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커튼을 닫고 시야를 차단했다.
할아버지를 속여 자신에게 협박까지 마다하지 않고 결혼을 성사한 여자의 눈물은 연기에 불과할 테니까.
온채원은 2층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기운을 차렸다.
실수는 이미 저질렀고 울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현재로서 최선을 다해 만회하는 게 1순위였다.
오후에 뽑은 난초들이니 지금 다시 심으면 어느 정도는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달빛 아래에서 온채원은 마치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풀처럼 가녀린 몸집으로 정원을 오가며 분주히 움직였다.
새벽 3시.
눈을 번쩍 뜬 박태성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살벌한 기운을 뿜어냈고, 낮에 봤던 여유롭고 무심한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마치 악몽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주위는 적막이 감돌았고, 일단 잠이 들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방안은 흡사 어두컴컴한 하수구를 연상케 했고, 그는 음침한 하수구에 갇힌 괴물이라도 된 듯싶었다.
이때, 박태성의 귀에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다름 아닌 미세한 소음이었다.
하지만 작은 인기척 덕분에 그는 어둠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고, 그제야 소리의 출처와 정원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작고 여린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다.
뿌리째 뽑혔던 난초들이 다시 땅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온채원은 조심스럽게 난초를 심었다.
지금 당장 2천만 원은 없으니 최대한 살리려고 애를 썼고, 나머지는 나중에 돈을 벌어서 천천히 갚을 생각이다.
머리는 점점 어지러웠고, 아마도 어제 찬물로 샤워해서 열이 난 듯싶었지만 감히 멈출 엄두가 안 났다.
뿌리가 뽑힌 난초는 오래 끌수록 살리기 힘들었다.
이게 다 돈이지 않은가? 무려 아이들의 공책, 그리고 문구와 맞바꾸게 되는 셈이다.
반면 열이 나는 게 무슨 대수라고, 어차피 약만 먹으면 금세 괜찮아질 것이다.
2층에 있는 박태성은 무슨 생각인지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고, 주체할 수 없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온채원은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모든 난초를 다시 심었다. 그리고 물을 주고 속으로 제발 살아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곧이어 손에 든 물뿌리개를 떨어뜨리더니 정신을 잃고 꽃밭 옆에 쓰러졌다.
그녀는 오아시스에 도착한 이후로 줄곧 일만 하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게다가 어제 찬물로 샤워해서 감기 기운이 살짝 있었고, 오늘 오후에는 땡볕에서 잡초를 뽑고 저녁에는 속상한 마음을 달래기도 전에 밤까지 꼴딱 새웠으니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무리가 오기 마련이다.
2층에서 지켜보던 박태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정원으로 내려가 온채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꼬질꼬질한 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여자를 발견하고 마지못해 안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물론 호의를 베풀어서가 아니라 눈앞의 성가신 꼬맹이가 괜히 열이 나서 어디 아프기라도 한다면 할아버지에게 설명할 마땅한 핑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열제를 찾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서 약 먹어.”
의식을 잃은 사람이 고작 말을 건다고 어찌 깨어나겠는가? 온채원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인내심이 없는 박태성은 그녀를 일으켜 앉히더니 해열제를 억지로 입에 쑤셔 넣었다.
약이 너무 쓴 탓인지 온채원은 비몽사몽 눈을 떴다.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동자에 물기가 서려 있는 모습은 마치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평소 자신을 돌봐주던 이웃집 오빠가 어렴풋이 보인 느낌에 온채원은 박태성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며 코맹맹이 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오빠, 너무 써.”
박태성은 흠칫 놀라더니 손가락을 빼내고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
“뱉지 말고 삼켜.”
온채원은 뱉고 싶었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고분고분 약을 삼켰다. 그리고 남자의 품에 안겨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다시 눈을 스르륵 감았다.
박태성은 품에 기댄 여자를 들어 올려 침대에 던져버리고, 왠지 모르지만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쩌면 온채원의 눈이 하수구에 있는 새끼 고양이와 너무 닮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심지어 뼛속까지 얼어붙은 피가 어느 정도 온기를 되찾은 느낌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