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1장

“서강호 씨랑 결혼할게요.” 송연아는 전화를 걸기 전에 위스키 반병을 마셨다. 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지더니 꽉 잠긴 남자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고, 잠결에 연락을 받아 짜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지금 몇 시인지 알아요?” 시간까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지라 서둘러 휴대폰을 내려다보았고 이미 새벽 2시가 넘었다. “죄송해요. 내일 다시 연락드릴게요.” “좋아요.” “네?” “다만 내일 해외로 출장 가서 한 달 뒤에 다시 돌아오니까 그때 가서 혼인신고 해요.” “네...” 전화를 끊고 나서 송연아는 어리둥절했다. 보름 전, 시골에 계신 외숙모가 갑자기 남자친구를 소개해주겠다며 연락이 왔다. 다름 아닌 옆집 할머니 이현미의 손자인데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청북 대학교에 합격했을뿐더러 졸업하고 나서도 복지가 좋은 회사에 취직해 4대 보험은 물론 명절 선물도 챙겨준다고 했다. 당시 말로만 알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어영부영 넘어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연락받고 깜짝 놀랐다. 사실 소개팅할 시간도 연애할 여유도 없다며 그녀만 괜찮다면 전 단계는 건너뛰고 바로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제정신 맞아?’ 당시 그녀가 속으로 들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고 일단 고민 좀 해보라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사실 지난 2주 동안 까먹고 지냈는데 오늘 밤에 덥석 연락했다. 실검을 확인해보니 여전히 난리가 났다. 인기 여배우 온서우의 임신설이 제기되면서 상대도 유명한 영화배우이지만 기혼자라고 했다. 그녀가 ‘내연녀’로서 온갖 뭇매를 맞아 연일 검색 순위를 갱신할 때 이성 그룹 둘째 도련님이 나서서 본인이 바로 그녀의 남자친구이자 아이의 진짜 아빠라고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해명했다. 게다가 네티즌의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동영상까지 공개했고, 며칠 전 온서우의 생일 파티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이내 여론도 긍정적인 분위기로 바뀌었고 팬을 포함한 사람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지금까지도 [결혼을 앞둔 온서우, 예비 신랑은 바로 이성 그룹 이정호]라는 타이틀이 실검 1위를 장악했다. 이를 보자 송연아는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온서우가 이정호의 여자친구라면 그녀는 뭐지? 둘이 함께 보낸 8년이라는 세월은 정녕 아무 의미가 없었단 말인가? 결국은 바보 같은 자기 탓이며 지금이라도 헤어지기로 했다. 반면, 서강호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단지 그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앞으로 아내와 함께 여느 평범한 부부처럼 살고 싶어요. 서로 의지하고 존중하며 검은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비록 거창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녀가 원했던 삶이기도 했고, 이정호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정호의 별장에서 살고 있었기에 얼른 이사를 해야 했다. 출근 시간이 다가왔고, 송연아는 2시간 남짓 자고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소파에 누워 있는 이정호를 발견했다. 머리가 헝클어진 채 미간을 찌푸린 모습을 보니 어젯밤 과음으로 인해 아직 속이 안 좋은 듯싶었다. 그녀는 가뿐히 무시하고 주방으로 가서 아침밥을 차렸다. 소면을 삶고 있는 와중에 이정호가 다가왔다. 진한 술 냄새를 풍기며 뒤에서 끌어안더니 턱으로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아, 머리야... 해장국 만들어줘.” 송연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실에서 기다려.” 그는 눈을 감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대로 잠깐 있자.” “냄새나.” “그래?” 이내 고개를 숙여 킁킁거렸다. “알았어. 올라가서 씻고 올게.” 송연아는 냉장고 맨 위쪽 선반에서 보관 용기를 꺼냈고, 안에 해장국 재료가 들어 있었다. 이정호는 워낙 접대하는 일이 많다 보니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이라 날이 갈수록 간이 나빠졌다. 따라서 달인의 조리법을 참고해 컨디션에 맞는 해장국 레시피를 고안했다. 요리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에 주방을 벗어나면 안 되었다. 그녀는 국자로 저으면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무려 8년 동안 이 짓을 하면서 입맛은 사로잡아도 끝내 마음마저 되돌리지는 못했다. 어차피 정성 가득한 만찬도 오늘부로 끝이니까 그를 향한 마음을 깔끔히 접기로 했다. 이정호가 샤워를 마치고 내려오자 송연아는 뜨끈한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 이마를 문지르며 국물을 휘젓는 모습은 어젯밤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축하해.” 송연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정호는 고개를 들었고 잘생긴 얼굴에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가?” “매년 온서우의 생일에 끈질기게 프러포즈하더니 이번에 드디어 소원을 이뤘네?” 송연아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이정호가 온서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어느덧 15년이 되었다. 그동안 온서우의 생일이 되면 항상 프러포즈했는데 설령 연인 사이였던 기간도 예외는 없었다. 물론 신경이 안 쓰이면 거짓말이다. 단지 이정호를 사랑했기에 고통마저 감수했을 뿐이다. 이정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기사 봤어?” 송연아는 물끄러미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정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단지 보여주기식에 불과해. 스캔들이 잠잠해지면 이혼할 거야.” “보여주기식?” 송연아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혼인신고도 하고, 결혼식도 할 거야?” “당연하지. 아니면 부모님들이 허락할 리가 없잖아.” “그게 왜 보여주기식이지?”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가 해. 넌 알 필요 없어.” 그는 해장국을 몇 모금 마시더니 일어나서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나도 둘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다만 입장을 정리해야 할 필요는 있으니까.” 이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송연아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헤어져.” “젠장, 말귀를 못 알아들어? 진짜 결혼하는 게 아니라 연기라고. 나중에 다시 이혼할 거야.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어차피 처음부터 끝까지 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냥 모른 척하면 될걸, 관심을 받고 싶어 아주 악을 쓰네.” 여태껏 과연 그의 눈에 띈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 싶은 순간이었다. 이내 시선을 피하며 한마디 보탰다. “온서우랑 진짜 결혼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으니까 헤어져.” “송연아!” “지긋지긋해.”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지난 8년 동안 모든 정력을 쏟아부었는데 이제 그만하고 싶어.” “그래, 헤어져! 후회나 하지 마.” 이정호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대신 외투를 들고 씩씩거리며 집을 나섰다. 이별을 맞이하는 순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송연아는 운성 병원 산부인과 의사였고, 아침 일찍 진료실에 출근해 환자와 상담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간호사 조슬기가 문득 사담을 늘어놓았다. “온서우는 대체 누구의 아이를 가진 걸까요? 아빠가 영화배우라는 둥, 이성 그룹 이정호라는 소리도 있고. 물론 저라면 이정호를 택할 거예요. 돈이 많을뿐더러 얼굴도 잘생겼잖아요. 게다가 완전 순정남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무려 15년 동안이나 온서우를 짝사랑했대요. 하늘도 감동할 판이에요.” 별로 듣고 싶은 내용은 아닌지라 조슬기에게 환자를 데리고 검사하러 다녀오라고 내보냈다. 그제야 조용해지나 싶더니 이정호가 연락이 왔다. “내일 서우가 산전 검사받으러 너희 병원에 가니까 미리 준비해.”
Previous Chapter
1/100Next Chapter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