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서지훈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그 두 글자가, 그리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말도 아닌 것 같았다.
“난 당신과 이혼하지 않을 거야. 그건 당신이 잘 알잖아.”
서지훈은 굳은 얼굴을 했다.우뚝 걸음을 멈춘 고아람은 등을 돌렸다.
“내가 사무소 근처 산다는 건 어떻게 알아?”
“내가 어떻게 안 건지는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 말이 맞아, 아니야?”
고아람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 맞아. 내가 사는 곳은 당신 사무소랑 멀지 않은 곳에 있긴 해. 하지만 그렇다고 왜 내가 재결합을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
서지훈은 자신만만하게 반박했다.
“그게 아니면? 그곳에 지낼 다른 이유가 있어? 거긴 집값도 말도 안 되게 비싸서 임대라고 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 다른 목적이 없었다면 그럴 리 있겠어? 그러니까 네가 그곳에 있는 건 다 나 때문인 거지.”
고아람은 화가 치밀어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고아람, 설마 그 근처에서 일한다고 하려는 건 아니지?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졸업한 뒤에는 나랑 결혼해서 경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아무리 네가 학력이 높다고 해도 집에서 밥이나 하고 빨래나 하던 사람을 직원으로 들이고 싶지 않을 거야.”
고아람이 서지훈을 쳐다봤다. 그녀는 심장이 아프게 찔리는 기분이었다. 서지훈의 눈에 자신의 가장 큰 가치는 밥이나 하고 빨래나 하는 사람인 건가?
“그래서 당신 눈엔 내가 빨래나 하고 밥이나 하는 게 어울린다는 거야?”
코끝이 시큰함으로 물들었지만, 억지로 밀어 넣었다.
더는 서지훈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내 업보지.”
눈이 멀어 저런 사람을 만난 자신이 잘못이었다.
서지훈도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상처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을 수 있어. 근데 이게 현실이야. 현실은 현실이야, 네가 학교 다닐 때 배운 건 현실에 쓸 수 없어. 넌 주방에서 돌아치고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것에 익숙해져서 직장에서 칼날을 주고받고 심리 전하는 것에 적응하지 못해. 게다가 넌 법 공부를 한 사람이야. 너무 오래 손 놓고 있으면 다시 시작하기 아주 힘들어.”
“당신은 변호사니까 잘 알겠지. 만약 내 혐의가 인정이 됐다면 난 형량을 받고 감옥에 가야 했어…>”
“증거가 눈앞에 있는 이상, 난 그렇게 할 수 밖에….”
“아니, 당신은 여아름을 믿었지만 나를 믿지 않았어.”
고아람은 명확하게 포인트를 이야기했다.
서지훈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마음에 있어 여아름이 더 중요했기에 감옥에 가는 게 자신이길 바랐던 것일지도 몰랐다.
“집으로 가.”
서지훈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겉옷을 여민 고아람은 차로 향했다. 시린 겨울바람은 칼로 베는 듯 시렸다.
차 안에 함께 앉은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집에 도착한 뒤, 서지훈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고아람이 내린 뒤 곧바로 운전을 하고 떠났다.
그가 떠난 것을 본 고아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여아름이 조사받는 일로 급한 것이겠지.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우선 이혼 서류부터 작성한 뒤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 두 사람이 지내고 있는 곳은 서지훈이 새로 구매한 부동산이었다. 부촌의 큰 대저택으로 족히 백 평이 넘었다. 이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물건이 많지는 않았고 전에 살던 집에도 아직 짐이 남아있는 탓에 큰 캐리어 하나에 짐이 다 들어갔다.
결벽증이 있는 서지훈 때문에 그녀는 집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녀의 물건을 전부 빼자 집에는 그녀의 흔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한 그녀는 고개를 숙여 4년간 단 한 번도 뺀 적 없는 결혼반지를 바라봤다. 그 반지를 매만지던 그녀는 끝내 반지를 뺀 뒤 이혼 서류와 함께 서지훈의 서재 책상 위에 올렸다.
아파트 단지에서 나온 그녀는 친정으로 가지 않았다.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걱정 어린 잔소리가 끊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유일한 친구인 신미연은 남자 친구와 지내고 있어 그쪽으로도 갈 수 없었던 탓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호텔로 향했다.
웅웅.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가 신미연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귓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어떻게 됐어? 내가 증언해 줘?”
이력서를 쓰고 있던 그녀는 자신의 이력서를 보고는 낙담함에 입꼬리를 올렸다. 학력만 볼만하지 실전 경험은 전무했다.
무력함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됐어, 이미 끝났어.”
“서지훈이 널 믿어줬어?”
신미영은 코웃음을 쳤다.
“여아름 그 여시, 그래도 너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던 거지….”
“우리 이혼할 거야.”
전화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지금 어디야? 너 데리러 갈게.”
고아람이 자신이 있는 곳을 이야기하자 신미영은 곧바로 찾아왔다.
고아람이 문을 열자, 문가에 기대 있는 신미연이 보였다. 붉은 원피스에 긴 앙고라 코트를 걸치고 선 그녀는 섹시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굵은 웨이브 머리를 넘기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들어와서 얘기해.”
고아람이 몸을 비켜주자 신미연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지내는 거야?”
“당분간은.”
고아람은 그렇게 대답하며 물을 한 잔 따라 건넸다.
“네가 예상한 것과는 정반대였어. 서지훈은 날 믿지 않았고 이 결혼은 더 이상 이어갈 의미가 없어졌지. 이혼 얘기는 이미 꺼냈고 아마 곧 있으면 내가 준 이혼 서류 볼 수 있을 거야.”
신미영은 잠시 침묵했다.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실….”
“넌 아쉽다고 할 거란 건 알아.”
고아람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난 기회를 줬어. 그 사람은 그걸 받지 않았지만.”
신미연은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내가 도와줄 거 있어?”
“우선 일자리부터 찾아야 해.”
그녀는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었다.
“사회에서 너무 단절돼 있었어. 이제 나를 다시 되찾을 때가 됐어.”
4년간 포기한 법학의 꿈을 이제 다시 찾을 때가 되었다.
그녀의 꿈을 포기할 만큼의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신미연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좋은 생각이야.”
“이혼 축하해. 술이라도 한잔 사 줘?”
신미연은 그녀를 향해 눈썹을 들썩여 보였다.
고아람은 지금 확실히 기분이 안 좋았고 신미연이 자신을 달래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잔할래?”
“잠깐만, 옷 갈아입고 올게.”
신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당부했다.
“예쁘게 입고 와.”
고아람은 트렁크를 열었다. 예쁜 옷이 있을 리가 없었다. 평소엔 집에서 집안일이나 하고 서지훈을 챙기기나 했던 터라 가장 자주 갔던 곳은 마트나 시장이 전부라 가끔 무거운 것을 들 때에도 괜찮게 편한 옷밖에 없었다.
“아니면 지금 사러 갈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신미연을 쳐다봤다.
신미연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혼 수속 전이지? 멀쩡히 있는 카드를 왜 안 긁어? 지금 산 건 다 네 개인 재산이기도 하잖아.”
“그러네.”
고아람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자.”
신미연은 그녀를 끌고 호텔을 나섰다.
오늘 공판이 열렸고 이번 일이 이대로 끝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서지훈의 친구들은 임한성을 필두로 해 그의 기분을 전환해 주겠다고 술자리를 마련했다.
서지훈의 안색은 몹시 안 좋았다.
서지훈은 가서 사건에 대해 알아봤었다.
경찰 쪽에서는 이미 사건을 접수했고 여아름의 범죄 정황은 아주 명확했다.
“그거, 사실 형수님이 집에만 있으니까 심심해서, 그래서….”
임한성이 위로를 건네려 했다.
룸 안이 무겁게 착 가라앉았다.
신이한이 분위기를 풀려고 입을 열었다.
“어라, 여아름은?”
그는 은근하게 서지훈을 툭 쳤다.
“형, 그렇게 늘어져 있을 거 없어요. 작은형수가 옆에 있잖아요….”
퍽!
신이한의 그 ‘작은 형수’라는 말이 서지훈을 툭 건드렸다.
들고 있던 술잔을 내던지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술이 사방팔방에 튀었다. 그 광경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이 빠졌다.
삽시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임한성은 고아람이 잡혀가서 서지훈의 기분이 안 좋은 줄 알고 다가와 위로했다.
“형, 형수님 일로 기분 안 좋은 거 알아. 우리도 이해해, 그 금지 물품 양도 얼마 안 되잖아? 설령 형량 나온다고 해도 길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형 옆에는 여아름이….”
“말 다 했냐?”
서지훈은 안 그래도 속이 시끄러웠는데 친구들이 계속해서 여아름 이야기를 꺼내니 그동안 참고 있던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했다.
여아름은 그를 속였고,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
고아람이 그 일로 자신에게 이혼까지 요구한 탓에 그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아져 곧바로 겉옷을 챙겨 일어났다.
“형.”
임한성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구까지 갔다가 걸음을 멈춘 서지훈은 고개를 돌려 친구들을 쳐다봤다.
“앞으로 내 앞에서 여아름 얘기 꺼내지 마. 꺼내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남아있는 사람들만 서로 시선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왜 저러는 거야?”
구석에 앉아 있던 주지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임한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안다니?”
서지훈은 곧장 차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리면 고아람은 곧바로 하던 일을 멈추고 마중을 나와서는 슬리퍼까지 놓아주고 불편한 겉옷을 벗겨주는 등 꼼꼼히 보살펴 주었었다.
하지만 오늘, 서지훈이 집에 들어왔을 땐 집은 썰렁하기 그지없었고 고아람도 그를 맞아주지 않았다.
순간 조금 적응이 되지 않아 외투를 되는대로 내던진 뒤 허리를 숙여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그는 피곤함에 소파에 앉아 두 눈을 꼭 감고 휴식을 취했다.
“람아, 나 피곤해.”
서지훈이 피곤하다고 할 때면 고아람은 그의 옆에 항상 있어 주며 전문적인 손길로 마사지를 해주고 기분을 달래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었었다.
그러나 고아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고 방안도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고아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집에 없는 듯 해 서지훈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