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눈을 조금 가늘게 뜨자 정은지는 지난 일들이 마치 영화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전생에 한아진이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여전히 독약처럼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아진은 온갖 수단을 써서 나쁜 말을 하며 정은지를 현혹시켰고 결국 그녀는 여준수와 결혼하는 것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아진은 고하준이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라고 말하며 고하준과 함께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정은지는 그렇게 한아진의 속임수에 빠져 아무런 방어도 없이 함정에 빠졌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 왜 이렇게 어리석었던 거지?’
한아진의 거짓말을 모두 믿고 고하준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착각하며 여준수와 계속 싸우고 그를 멀리하려고 애썼던 정은지는 결국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방탕하다고 비난하게 만들었다.
정은지는 눈을 감고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한아진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이상 절대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 한아진이 다시는 성공하지 못하도록 만들 거야.’
정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입고 문손잡이를 잡고 잠시 멈추었다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서 한아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급히 정은지의 팔을 잡고 말했다.
“아, 왜 이제야 문을 열어?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 정말 놀랐어.”
한아진은 뒤꿈치를 들고 방안을 힐끗 보며 약간의 비난과 질문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약속했잖아? 어젯밤에 몰래 빠져나오기로. 그런데 왜 방에서 밤을 지새웠어? 준... 준수 씨가 너한테 뭐 하지 않았어?”
한아진은 뭔가 알아내려는 듯 정은지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정은지는 눈을 내리깔고 주먹을 꽉 쥐며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한아진이 자신을 부추겼던 일을 정은지는 잊을 수 없었다.
어젯밤은 그녀와 여준수의 약혼식 밤이었다. 어른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정은지는 여준수와 함께 방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아진은 즉시 문자를 보내 정은지에게 여준수를 취하게 만들어 밤에 몰래 빠져나오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에 한아진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정은지는 속으로 냉소했다. 어젯밤 그녀는 한아진의 말대로 하려 했지만, 술을 잘 마시는 여준수는 단번에 정은지의 계략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도 해명할 생각이 없었다.
한번 죽고 난 후에야 정은지는 한아진이 여준수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당시 어리석게도 한아진에게 속아 넘어갔던 자신을 자책했다.
정은지는 마음을 다잡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 어젯밤에 깜빡 잠들었어.”
한아진은 약간 다급하게 말했다.
“잠들었다고? 어떻게 잠들 수가 있지? 준... 준수 씨는? 같이 있었어?”
한아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어젯밤 그녀는 정은지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해 불안해져서 아침 일찍 문을 두드리러 온 것이었다.
“응. 함께 있었어. 어제가 우리 첫날밤이잖아. 단둘이 있는 게 뭐가 잘못된 거야?”
정은지는 한아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한아진은 잠시 당황했다. 왜인지 정은지의 말이 날카롭게 느껴졌고 그녀의 눈빛도 매서운 것 같았다.
“그런 뜻은 아니야...”
한아진은 말을 멈췄다. 모든 생각이 정은지의 목 뒤에 있는 키스 자국에 의해 잠식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눈동자마저 움츠러들며 한아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너 목에 그건...”
그러자 정은지는 목을 만지며 다소 당황한 척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눈을 내리깔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한아진이 다시 묻기도 직전에, 키 크고 늘씬한 모습을 한 남자가 방 안에서 나왔다.
바로 여준수였다.
그는 올블랙 수트에 강렬한 아우라를 풍기며 나타났다.
“도련님...”
한아진은 낮게 불렀다.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채로 말이다.
하지만 여준수는 그녀를 단지 차갑게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인사도 없이 두 사람을 지나쳐 걸어갔다.
정은지는 그를 부르고 싶었지만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한아진을 처리하고 나서 생각하자.’
정은지는 아쉬운 눈길을 돌려 한아진을 바라보았다.
여준수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한아진의 눈빛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눈 속에 타오르는 불꽃은 점점 더 커져가 거의 미쳐갈 지경이었다.
어젯밤 그녀가 걱정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다!
한아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먹을 꽉 쥐었지만 돌아설 때는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
뒤이어 그녀는 마치 정은지를 위해 걱정하는 듯 말했다.
“강제로 너한테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너무 하네... 정말 마음이 아파. 이렇게 계속되면 안 돼. 이 일을 이대로 놔두면 너한테 점점 불리해질 거야.”
정은지는 그녀의 거짓된 모습에 속으로 냉소하며 물었다.
“그래서... 나를 어떻게 도우려는 건데?”
한아진은 즉각 대답했다.
“당연히 파혼해야지. 기회를 찾아서 준수 씨와의 결혼을 끝내. 그래야 너는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어. 너 고하준 씨 좋아하잖아?”
정은지는 그녀의 말을 듣고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내가 그렇게 하면 우리 가문과 여씨 가문의 어른들이 허락하지 않을 거야.”
“괜찮아. 내가 다른 방법으로 도와줄 수 있어.”
성급해하는 한아진의 모습을 보며 정은지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가면을 벗겨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나 먼저 옷 갈아입을게. 잠시 기다려줘.”
정은지는 문을 닫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에 한아진은 그 자리에서 정은지가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예리하게 느꼈지만 정확히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정은지가 어젯밤 이후로 뭔가 이상해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
거울 앞에서, 정은지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전생에는 내가 한아진 네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지. 하지만 이번 생에는 누가 누구를 갖고 노는지 어디 두고 봐.’
15분 후, 정은지는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한아진은 재빨리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우리 쇼핑하러 가자. 며칠 전에 명품 매장에서 정말 예쁜 드레스를 봤어. 너무 갖고 싶더라... 너 내 안목 믿잖아, 그렇지?”
정은지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진실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한아진이 또다시 자신을 이용해 물건을 사게 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생에도 그녀는 거의 한아진의 고정 ATM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정은지는 한아진의 손아귀에 놀아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정은지는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오늘은 못 가겠어. 어젯밤에 좀 피곤했거든. 정신이 없어서 먼저 집에 가서 쉬고 싶어.”
그러자 한아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은지가 거절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정신을 차린 후 표정은 거의 일그러질 뻔했다.
“하하, 내가 그걸 깜빡했네. 어젯밤에 정말 피곤했겠지... 그럼 조심해서 가.”
한아진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정은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택시를 잡았다. 떠날 때, 그녀는 뒤에서 느껴지는 악의에 찬 시선을 확실히 느꼈다.
차 안에서 정은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고 휴식을 취하면서 문득 여준수가 생각났다.
전생의 그는 어젯밤 이후로 정은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두 집안이 준비한 신혼집에도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전생에는 너에게 상처를 줬지만 이번 생에는 너를 반드시 되찾을 거야.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