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전생에서 나는 권경현과 단지 소꿉친구일 뿐이라 여겼다. 애틋한 감정은 있었으나, 혼인을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권씨 가문 서자였고, 나는 이 나라 왕실의 하나뿐인 국모 윤정왕후의 소생 공주였다.
그러나 권경현은 끝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나를 처로 얻지 못하면 죽겠다며 협박했고, 결국 마음이 흔들렸던 나는 스스로 아바마마께 아뢰어 혼약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연모한 적조차 없었다. 그저 내 신분을 등에 업고, 권씨 가문의 세력을 손에 넣으려 했던 것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권경현이 진정으로 아꼈던 이는 민연아였다. 세자빈이 되어 장차 이 나라의 국모가 되려는 그녀의 앞날에 해가 될까 봐 그 마음을 숨기고 지냈을 뿐이었다. 그의 마음은 한 번도 나를 향한 적 없었다.
그리고 단지 그녀의 한마디에, 그는 가례 첫날밤 나를 모욕하고 절벽 끝으로 몰아세웠다.
전생의 그 기억이 되살아나자, 나는 치가 떨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아바마마 앞에 이마를 박고 간절히 호소했다.
“아바마마, 제발... 부디 이 혼약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아바마마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드러난 진실은 충격적이었고, 그 속에 얽힌 관계들은 예상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했다.
아바마마께서도 선뜻 판단을 내리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하지만 한참의 침묵 끝에, 마침내 입을 여셨다.
“연우 공주와 안동 권씨 가문의 서자 권경현의 혼약은 이 시각부로 파기한다. 권경현은 왕실을 능멸하고 공주의 옥체를 훼손한 죄로 곤장 사십 대를 내리고, 한 달간 형방에 가두어 반성케 하라!”
권경현은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쓰러지듯 끌려갔다.
권세진은 놀란 얼굴로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나는 감격에 복받쳐, 아바마마께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감사를 드렸다.
아바마마의 시선이 다시 다른 두 사람에게 향했다.
민연아는 겁에 질려 울먹이며 이휘의 뒤로 숨었고, 이휘는 마치 벼락이라도 막아내겠다는 듯 앞을 가로막았다.
그 광경에 아바마마의 미간이 좁아지고, 눈빛은 차갑게 가늘어졌다.
“세자는 아직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것이냐?”
그러자 어마마마가 슬그머니 거들었다.
“이번 일은 세자도 경솔했던 듯하옵니다. 선의였을지라도 전하의 마음을 어지럽힌 것이 사실이니, 부디 탄신을 기리는 뜻으로 경서 열 권을 필사토록 하시지요.”
그 말에 나는 실소가 나올 뻔했다.
‘왕을 능멸하고 공주를 누명 씌운 죄를, 겨우 경서 필사로 넘기겠다고? 세자가 감히 전하를 속인 것! 이 일 하나만으로도 반역의 죄로 다스릴 수 있을 텐데!’
말을 꺼내려던 순간, 어마마마의 눈빛이 내게 꽂혔다.
싸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 눈은 자식을 보는 어미의 눈이 아니라, 마치 원수를 보는 눈 같았다.
‘아바마마의 탄신연에 공주인 내가 보이지 않아도, 다친 몸으로 돌아와도, 어마마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어... 하지만 오라버니가 곤경에 처하니 안색이 달라지셨네...'
나는 입술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바마마는 한동안 깊은 침묵에 잠기셨다.
그러다 결국 어마마마의 친정과 세자의 체면을 감안한 듯, 더 이상의 처벌은 피하셨다.
아바마마는 긴 한숨과 함께, 담담히 입을 여셨다.
“그리고 공주의 공을 가로채려 했던 여인은 곤장으로 장폐(곤장으로 때려 죽이는 형벌)하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억눌려 있던 것이 뻥 뚫렸다. 속이 시원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래. 앞으로는 이렇게 망나니처럼 사는 거야. 순하고 착하게, 말 잘 듣고 희생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그 따위 미덕은 결국 나를 밟는 자들에게 면죄부가 될 뿐이야! 누가 뭐래도 나는 대성의 공주, 윤정왕후 소생 공주란 말이야. 금지옥엽으로 태어난 이상, 이번 생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아갈 거야.’
아바마마의 입에서 ‘장폐’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휘는 마치 정신 줄이 끊긴 듯 그 자리에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