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나는 이휘의 눈동자 깊숙이 스쳐 지나가는 혐오를 똑똑히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옛말에 오라비는 아버지 같은 존재라 하였사온데, 공주인 저의 교양이 부족하다면... 그 또한 오라버니의 잘못 아니겠사옵니까?”
전생에도 이휘는 내게 지독하리만치 차가웠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가차 없이 엄히 벌했기에, 나는 그저 엄격한 성격 탓이라 믿었다. 어리석게도 법도를 지키고 예를 갖추면 그를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가 민연아에게 보였던 따스하고 다정한 모습을 본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오라비는 곧 아버지라더니... 웃기는 소리였지. 그딴 말, 개 짖는 소리보다 못하구나!’
우리의 팽팽한 대치는 어마마마가 나타나고서야 겨우 끝이 났다.
민연아가 재빠르게 어마마마에게 다가가 고변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중전마마, 소녀는 억울하옵니다...”
어마마마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무심히 말했다.
“밤이 깊었다. 그만 물러들 가 쉬거라.”
어마마마는 궁의 체통을 누구보다 중히 여겼다. 전생의 나 역시 그러했으나, 이번 생에는 그런 체면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공주라는 지위를 믿고 민연아를 괴롭히는 일에 더욱 거리낌 없을 생각이었다.
이른 새벽 연못에 밀어 넣어 찬물에 흠뻑 빠지게 하는 일쯤은 예삿일이었고, 밥상 위에 죽은 쥐를 올리거나 규방 수업 중 민연아의 얼굴을 가린 면사포를 벗기고는 깔깔 웃으며 ‘모두 와서 보아라! 이 흉측한 얼굴을 말이다!’하고 놀려대기도 했다.
민연아는 상처투성이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원망으로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예전의 여유롭고 우아한 모습은 없었고, 결국 신분의 차이 탓에 무릎을 꿇고 빌 뿐이었다.
“공주마마, 제발 소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꿈을 꾸는 게로구나!”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뺨을 냉정하게 후려쳤고, 그녀의 처참한 몰골을 더욱 참혹하게 만들었다.
또 세자께 달려가 울며 고할 줄 알았건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나중에야 그들이 바로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휘가 궁궐 한가운데 앉은 나를 보고 물었다.
“아바마마 탄신일에 무슨 예물을 올릴 생각이냐?”
전생의 나는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온 정성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다. 아바마마의 강산이 길이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직접 자수를 놓았고, 병풍을 완성했지만 이휘는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인 자기가 그 예물을 올리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겠냐며 빼앗아 갔다.
그것도 모자라 내가 준비한 예물을 고스란히 민연아에게 넘겨주었다.
탄신일 당일, 민연아가 그 병풍을 바치자, 아바마마는 크게 기뻐하시며 그녀에게 상궁 자리를 내리셨었다.
자수를 뺏기고 급히 준비한 예물은 초라해졌고, 그 일 이후로 아바마마와의 사이가 소원해졌었다.
지난날의 어리석음이 새삼 쓰라려, 나는 속내를 감춘 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예물? 준비 하지 않았어. 공주인 내가 곧 아바마마께 올리는 가장 귀한 선물 아니겠어?”
이휘는 할 말을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뛰어난 수놓기 솜씨를 가졌음을 알기에 다시 나를 설득하려 했다.
“요즘 나라 일로 심신이 지친 아바마마를 위해 네가 오라비를 대신해 아바마마께 올릴 탄신 예물을 수놓아 준다면 참으로 마음이 놓일 것 같구나...”
“오라버니, 내가 왜?”
내가 평소와 달리 냉담히 맞받아치자, 이휘의 얼굴이 끝내 어두워졌다.
“좋게 말할 때 듣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
아바마마의 탄신일 당일, 황혼이 드리우고서야 나는 이휘가 말한 ‘후회’의 의미를 깨달았다.
연회장으로 향하던 길, 권경현이 불쑥 앞을 막아섰다.주변 시녀들이 조용히 물러나자, 불길한 기운에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하지만 권경현은 다정한 척 다가와 내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공주마마께선 수를 놓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살아가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연아는... 다르옵니다. 그러니 길을 내어주시지요.”
그 순간, ‘딸깍!’하고 손목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타들어 가는 고통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권경현은 내 소매 속에 숨겨 두었던 비단을 빼내더니,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민연아에게 그것을 건넸다.
사람들 눈을 피해 밤마다 조심스럽게 수를 놓았건만, 결국 그 노력은 수포가 되었다.
민연아는 비단을 받아 들며 미안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눈빛엔 악의가 서려 있었다.
“공주마마면 뭐하나요? 지아비도, 세자 저하도 다 공주마마를 외면하고 계시잖아요. 지금이야 기세등등할 수 있겠지만, 세자 저하께서 왕위에 오르시면요? 그때는 제가 내명부의 수장이 될 텐데. 공주마마는 그저 제 발아래에서 무릎 꿇고 계셔야죠.”
나는 이를 악물고 그들, 그 천한 남녀를 노려봤다.
“천한 것들!”
나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멀쩡한 왼손을 들어 ‘짝!’하고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면사포가 벗겨지며 민연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에 났던 상처는 거의 다 아문 듯했다.
이휘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민연아는 뺨을 감싸 쥔 채, 마치 내가 발광이라도 한 듯 비웃었다.
“여기서나 그렇게 날뛰시죠. 전하의 탄신연에 중전마마의 유일한 소생이신 공주마마께서 불참하시면 전하께선 과연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요?”
그녀는 달콤한 꿈에 젖은 미소를 지으며, 내 비단을 들고 아바마마의 탄신연으로 향했다.
상궁 자리를 노리는 민연아는 이제 본격적으로 궁에서 날개를 펼치려 하고 있었다.
뒤쫓으려던 내 앞을 권경현이 막아섰다. 그는 민연아를 감추듯 등 뒤에 세워두었고, 나는 치솟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문득, 전생에 내 탄신 예물이 민연아의 공으로 둔갑했을 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 낭자는 세자 저하의 은인이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세자 저하의 친동생이시니, 당연히 민 낭자에게 고마워하셔야지요. 이 일을 입 밖에 내신다면, 마마뿐만 아니라 오라버니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소신은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여인은 정말 싫사옵니다.”
그 말을 떠올린 나는 이성을 놓고 고함을 질렀다.
“버러지 같은 자식... 민 낭자? 민연아랑은 진작에 짜고 친 사이였지! 그 천한 계집이 세자만이 아니라, 너한테도 생명의 은인이라더라? 작당 모의도 정도껏 해야지! 아바마마께서 이걸 아시면... 정말 가만두실 것 같아?”
하지만 그 순간, 세자 저하께서는 언젠가 왕위에 오르실 몸이라던 민연아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민연아가 아무리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냈어도, 권경현은 여전히 감싸고 돈다는 건 민연아가 어떤 인간인지 뻔히 알고도 그랬다는 거야...’
“예! 민 낭자가 예전에 제 목숨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공주마마께서도 조금만 참아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 일만 무사히 넘기면... 공주마마를 정식으로 제 처로 맞아들이겠습니다!”
권경현은 예의 차리는 척 혼자만의 생각에 젖은 얼굴로 말했지만, 나에겐 역겨울 뿐이었다.
“고집부리지 마시고 내의원에 들러 손부터 치료하시지요. 이대로 두시면... 정말 손을 못 쓰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그는 경련하는 내 손목을 조심스레 쥐며 덧붙였다.
“그리고 세자 저하를 봐서라도... 공주마마도 오라버니께 누를 끼치고 싶진 않으시겠지요?”
말은 달콤했지만, 손끝엔 한 치의 온기도 없었다.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심장을 후벼팠다.
‘그래. 이 손이 부러진 이 자리엔 아무도 없는 것도 수상해. 게다가 이 모든 일을 이휘까지 알고 있다면... 결국 너희 셋이 짜고 벌인 짓이겠지’
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구나. 그 계집이 세자의 목숨을 구했으니, 나 또한 감사해야 한다고? 너희 둘이 입은 은혜를 왜 내가 갚아야 한다는 말이냐! 정녕 기가 막히는구나. 그리고 누가 너 같은 서자에게 시집가고 싶다더냐? 이 몸이 아무 데나 시집갈 줄 아느냐!”
나는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년놈들... 전부 다 죽여버릴 것이야!”
나는 멀쩡한 손으로 머리 장식에서 비녀를 뽑아 권경현의 눈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피했지만, 그 반동으로 중심을 잃고 내 손을 놓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무릎을 힘껏 들어 그의 다리 사이를 정통으로 찼다.
순간, 궁 안에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