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안방의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와 침대 위의 야릇한 소리가 뒤섞였다.
따뜻한 노란색 조명 아래, 남자의 옆모습은 잘생기고 차가웠으며 깊은 눈빛은 품 안의 여자를 집어삼킬 듯했다.
안희연의 예쁜 얼굴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현준 씨...”
그는 두 팔로 그녀를 꽉 안았다.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그의 모습에 안희연은 이 남자가 자신을그가 자기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때 갑작스러운 벨 소리가 방 안의 분위기를 깨뜨렸다.
휴대폰 화면에 뜬 발신자를 곁눈질해 보는 순간, 안희연의 몸이 굳었다.
발신자는 안수지였다.
남자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고현준은 완전히 냉정함을 되찾았다.
“금방 갈게.”
“현준 씨, 나가려고?”
안희연은 그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며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잡고 싶었으니까다.
“어.”
고현준은 휴대폰을 챙겨 밖으로 나가며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존재.
이 순간 알몸인 자신이 창녀 같다는 생각에 안희연은 심장이 칼로 에는 듯 아팠다.
너무 아프고 씁쓸했다.
그녀는 실크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리며 입을 열었다. 차갑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쉰 기운이 남아 있었다.
“현준 씨, 그냥 그렇게 가? 안수지가 내 냄새를 맡고 질투할까 봐 걱정 안 돼?”
문을 열려던 고현준의 동작이 순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안희연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 있었다.
은은한 불빛 아래 드러난 남자의 완벽한 얼굴에는 상위자의 냉정함과 무정함이 서려 있었고 차가운 시선은 마치 몇 분 전 자신과 뜨겁게 사랑을 나눈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안희연은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밝고 사랑스러운 얼굴에는 매혹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도발과 조롱이 담겨 있었다.
“희연아, 수지는 지금 손에 상처가 재발했어. 그때 손바닥의 여러 근육과 신경이 끊어져서 거의 쓸 수 없게 될 뻔했잖아...”
고현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상기시켰다.
“네가 그렇게 만들었지.”
안희연은 이불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떨리는 속눈썹과 함께 애써 지어 보이던 미소가 무너져 내렸다.
“현준 씨는 의사도 아닌데 가서 뭘 할 수 있겠어? 한밤중에 자기 매부한테 전화해서 동생 침대에서 불러내는 게 정말 적절하다고 생각해?”
남자는 두세 걸음 만에 돌아와 허리를 굽혀 안희연의 턱을 잡았다. 엄지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피부를 매만졌다.
“희연아, 네가 더 원한다면 내가 돌아와서 만족시켜줄게. 얌전히 있어. 알았지?”
“난 네가 더러워!”
안희연은 그의 손을 쳐내고 고개를 돌렸다. 치욕스러움에 몸이 떨렸다.
더럽다는 말에도 남자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눈썹을 치켜올렸다.
“현준 씨!”
안희연은 심호흡을 하고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내가 오늘 밤 당신이 여기 남아줬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하지만 그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남자가 말을 끊었다.
“희연아, 넌 그럴 자격 없어.”
안희연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차가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당신 와이프인데 자격이 없다고?”
고현준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신사의 탈을 벗어 던지고 말했다.
“희연아, 네가 어떻게 사모님이 됐는지 내가 다시 알려줘야 해하나?”
...
안방에 남아 있는 남자의 냄새는 안희연을 숨 막히게 했다. 숨이 막혀 심장을이 쥐어짜듯 아팠다.
한 시간 후, 안희연은 안수지의 인스타 게시글을 보았다.
[작은 상처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 준다는 것,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죠.]
첨부된 사진은 남자가 창가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훤칠한 키에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 그 뒷모습만으로도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남자의 얼굴이 나오지 않았지만 안희연은 그가 자신의 남편 고현준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안희연의 가슴은 욱신거렸고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3년 전, 그녀는 누군가의 계략에 빠져 그와 하룻밤을 보내게 됐고 고씨 가문의 어른들은 체면 때문에 고현준에게 그녀와의 결혼을 강요했다.
그 당시 안씨 가문의 족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안희연은 기꺼이 그와 결혼했다.
왜 기꺼이?
고현준은 그녀가 오랫동안 몰래 좋아했던 사람이었으니까.
...
다음 날 오후, 고현준이 돌아왔다. 잘생긴 얼굴에는 밤샘으로 인한 피로가 역력했다.
안희연은 소파에 앉아 얇은 서류를 보고 있었다. 얇은 잠옷 아래 드러난 하얀 살결과 붉은 흔적들이 은근히 상상력을 자극했고 차가운 회색 바닥에 내려앉은 새하얗고 사랑스러운 맨발은 보는 이의 숨결을 달아오르게 했다.
고현준이 그녀에게 신발을 신으라고 말하려는 순간, 안희연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뛰어난 외모에 큰 키와 긴 다리, 절제된 예의범절, 재벌가 출신, 막강한 권력까지, 고현준은 제도의 모든 명문가 여성들이 가장 선망하는 남자였다.
“수지의 상처는 별로 안 심각했나 봐?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걸 보니?”
안희연은 무릎을 감싸 안고 나른하게 얼굴을 무릎 위에 얹었다.
고현준은 답하지 않았다.
안수지에 관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분명했다.
“현준 씨.”
안희연은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차분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하긴 해?”
고현준의 눈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지만 금세 이전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무슨 소리야?”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도 들은 듯한 반응이었다.
안희연은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애써 태연한 척 웃었어 보였다.
“알고 있었어.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단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 없었다.
안희연은 말을 이었다.
“현준 씨, 우리 이혼해.”
3년간의 결혼 생활도 고현준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으니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발에 닿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그나마 온화했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렸고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안희연을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밤의 폭풍처럼 매섭게 차가웠고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 또한 냉랭했다.
“뭐라고?”
숨 막히는 위압감에 안희연은 본능적으로 발을 움츠렸지만 오히려 남자의 손에 가느다란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따뜻한 그의 손바닥과 차가운 그녀의 피부가 맞닿은 순간, 그녀의 귀 끝은 수치심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짐짓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놔!”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손에 힘을 더했다.
“희연아, 고씨 가문 사모님답게 굴어. 쓸데없는 투정 부리지 말고.”
쓸데없는 투정?
안희연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면 어젯밤에 울고불고 매달려서라도 그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안수지가 그녀에게 과시할 기회도 없었을 텐데.
안희연은 손목을 돌려 준비해둔 이혼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
“이혼해. 나 질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