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감독님!”
멀리서 이정인의 외침이 들렸다.
강하나는 피곤한 눈빛을 빠르게 지우고 활짝 웃으며 뒤돌았다.
“오랜만이야.”
“그러니까요. 이게 얼마 만이에요! 저 지금 심장 뛰는 거 느껴지세요?”
이정인은 마음 같아서는 강하나를 와락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녀가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는 걸 알기에 꾹 참았다.
하지만 그때 강하나가 먼저 다가와 그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3년간 고생 많았어.”
이정인이 아니었다면 지난 3년간 안심하고 박지헌의 아내 노릇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정인은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익숙한 향기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돌아오시겠다고 마음 먹으신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감사해요.”
공항 VIP 라운지.
강하나는 푹신한 소파에 앉은 채 이정인이 늘어놓는 할리윌에서 일어난 재밌는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고 있었다.
“오거스트 그 사람은 정말 천재인 게 틀림없어요. 연속 3년이나 수상했다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내 놓고 정작 수상하러 올라가서는 관객들을 향해 손 키스만 날리고 수상소감은 한마디도 안 한 거 있죠?”
“천재와 미치광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들 하잖아.”
강하나의 말에 이정인이 크게 웃었다.
“확실히 미친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글쎄 얼마 전에 사람들의 실제 생활을 체험해보고 싶다고 파이프 수리공인 척하고 들어갔다가 하마터면 집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 뻔했다니까요? 그 일로 뉴스까지 타게 됐고 한동안 엄청 많은 비난을 들었어요.”
이정인은 신이 나서 얘기하다가 강하나의 표정이 어딘가 어두운 것을 눈치 채고 천천히 입을 닫았다.
사실 그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와 박지헌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박지헌과의 일 때문이 아니면 강하나가 굳이 할리윌로 돌아간다는 소리를 할 리가 없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감독님, 탑승하기 전까지 좀 쉬세요.”
강하나는 그의 배려에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이정인은 못 본 사이에 많이 의젓해지고 눈치도 빨라졌다.
강하나는 눈을 살짝 감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기댄지 5초도 안 돼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눈을 뜨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박지헌이었다.
[오늘 저녁에 같이 식사하고 싶었는데 회사에 일이 터져서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아. 또 곁에 있어 주지 못하게 돼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 없게 할게. 사랑해!]
이번만큼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강하나의 팔로우 중단 선언으로 하나둘 발을 빼기 시작한 영화 투자자들과 감독을 한시라도 빨리 잡아야 했으니까.
그녀는 박지헌이 서다은과 그런 사이인 걸 몰랐을 때는 박지헌이 급하게 영화를 제작하려는 게 단순히 회사 이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다은이라는 존재를 알고 난 뒤로 그제야 그의 행보가 그의 새로운 여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박지헌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서다은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물론 이번에도 역시 사진과 함께 말이다.
사진 속에서 박지헌은 차에 기댄 채 잔뜩 심각한 얼굴로 누군가와 통화고 있었다. 그리고 서다은은 마치 이제 막 19살이 된 소녀처럼 발랄하게 브이를 하며 활짝 웃고 있었다.
[이걸 어쩌죠? 지헌 씨가 오늘 저녁에 야근해야 한다네요?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지헌 씨와 함께 야근하기로 했어요. 남편 식사 걱정은 안 해도 돼요. 근처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한 뒤에 함께 야근하러 회사로 갈 테니까. 그럼 이만~]
강하나는 사진 속 두 사람을 아주 오래 바라보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대화 기록을 캡처했다.
“감독님, 혹시 어디 아프세요?”
이정인의 걱정 어린 표정에 강하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프기는. 그냥 잠깐 멍 때린 것뿐이야.”
“뭐 불편한 거 있으시면 얘기해주세요.”
“그래.”
이정인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솔직히 감독님 전화 받았을 때 기쁘기도 했고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어요. 불과 2개월 전에 저한테 아이 생각 있으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최소 2년은 돌아오지 않으시겠구나 했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갑자기 전화로 돌아오시겠다고 하셔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죠. 그래서 말인데 감독님, 정말 잘 생각하신 거 맞으세요...?”
만약 그녀가 그저 단순히 박지헌과 작은 갈등이 생겼다는 이유로 이러는 거면 다시 사이가 회복되는 그날 또다시 잠적하겠다고 할지도 모르기에 이정인은 걱정이 됐다.
“정인이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마. 난 내 결정을 번복할 생각 없어.”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이미 충분히 멍청하고 바보 같았기에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다.
그 뒤로 30분쯤 지났을까, 박지헌이 갑자기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그리고 영상이 보내짐과 동시에 최신 뉴스 알림음이 연이어 세 개나 울렸다.
[이정 그룹의 박지헌 대표, 운성시의 제일 높은 빌딩을 통째로 빌려 아내를 향해 사랑을 외치다!]
[세기의 로맨티스트 박지헌 대표, 또다시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하다.]
[박지헌 대표의 아내는 진정으로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인가?]
눈살이 찌푸려지는 기사 제목에 강하나는 얼른 박지헌이 보낸 영상을 틀었다.
영상을 틀어보니 서해 빌딩 전체에 [자기야, 사랑해.]라는 여섯 글자가 화려한 색감을 뽐내며 디스플레이 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편집까지 한 건지 로맨틱한 음악도 깔려있었고 드론으로 촬영된 거라 영상미도 좋고 상당히 근사했다.
하지만 강하나는 그런 영상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난 남자에게 이런 이벤트를 받는 건 전혀 기쁜 일이 아니니까.
[자기야, 봤어? 그간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오늘도 열심히 야근하는 불쌍한 내 처지를 봐서 한 번만 용서해줄 수 없을까? 기분이 풀렸다는 뜻으로 환하게 웃는 이모티콘 하나 보내줘. 응?]
강하나는 그 말에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가기를 눌렀다.
하지만 나가자마자 또다시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답장 안 해주면 나 오늘 안 잘 거야. 자기 문자 받을 때까지 뜬눈으로 지새울 거야.]
‘대체 언제까지 연기할 생각이지?’
강하나는 욱하는 마음에 빠르게 타자했다.
[지헌 씨, 그때 둘이서 함께 계약서를 찢은 다음에 약속했던 말을 기억해?]
[당연하지! 평생 하나 너만을 사랑하겠다고 했잖아!]
[그거 말고. 먼저 변심한 사람이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자는 말 말이야.]
[하나야, 하늘이 무너져도 널 향한 내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거야.]
빠른 그의 답장에 강하나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렇게도 다정하고 섬세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자기야, 지금 어디야? 나 지금 회사로 들어가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붕어빵 가게에 왔어. 손 비서 시켜서 집으로 좀 보내줄까?]
[나 지금 공항이야.]
탑승까지 이제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박지헌이 지금 당장 공항으로 달려온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나 오늘 떠나. 그러니까 나 찾지 마. 우리 둘 사이에 해야 할 얘기는 앞으로 변호사를 통해 얘기해줘.”
강하나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음성메시지를 보냈다.
“뭐? 공항? 너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딱 기다려! 지금 당장 공항으로 갈 테니까!”
박지헌 역시 다급했는지 음성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