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박지헌은 전화를 끊은 후 미안함 가득한 눈빛으로 강하나를 바라보았다.
“자기야, 그게...”
강하나는 이제는 변명거리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옅게 웃으며 그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가봐. 오늘도 급한 일 생긴 것 같은데.”
“미안해. 그리고 이해해줘서 고마워. 대신 다음에 온전히 시간 내서 자기 곁에 있을게!”
강하나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지헌은 그녀의 미소에 한결 편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선물 찾는 데만 집중하느라 침실이 전보다 많이 빈 건 눈치 못 챘나 보네? 차라리 다행이야. 안 그럼 떠날 때 피곤하기만 할 테니까.’
강하나는 2층으로 올라가 추억이 깃든 웨딩 사진들을 전부 다 갈기갈기 찢은 후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반지도 그라인더로 몇 번이나 조각낸 다음 역시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일련의 행동을 마친 후 그녀는 3년이나 살았던 방을 삥 둘러보았다. 아직도 이곳 곳곳에 박지헌과 그녀의 사랑이 가득 깃들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사랑도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박지헌이 먼저 배신을 했으니까.
강하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이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오늘 여기 뜰 거야. 그러니까 4시간 뒤에 공항으로 와.”
그 말에 이정인은 잔뜩 흥분한 채로 대답했다.
“네, 감독님! 그럼 이따 공항에서 뵐게요!”
“그래.”
전화를 끊은 후 강하나는 캐리어를 끌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때 우연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다 3년 전 식목일에 박지헌과 함께 심은 회화나무를 보게 되었다.
3년 전에만 해도 아직 작기만 했던 작은 묘목이었는데 3년이 지금은 태양으로부터 사람 하나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그녀와 박지헌의 사랑은 나무처럼 굳건하지 못했다.
“사모님, 어디 가시게요?”
그때 도우미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요. 캐리어가 고장이 나서 버리려고요.”
도우미는 큰 의심 없이 알겠다며 다시 갈 길을 갔다.
“잠시만요.”
강하나가 발걸음을 옮기려는 도우미를 불러세웠다.
“네, 사모님.”
“저거 잘라주세요. 아니다. 뿌리째 뽑는 게 낫겠네요”
강하나의 손끝이 회화나무로 향했다.
“네?”
그러자 도우미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저 나무는 대표님과 사모님의 사랑의 결실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런데 왜...”
“지헌 씨가 다른 묘목을 준비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뽑아주세요.”
도우미는 그 말에 알겠다며 나무 자를 공구를 가지러 갔다.
강하나는 도우미 여럿이서 나무를 뿌리 끝까지 뽑는 것을 확실히 지켜보고 나서야 속이 시원한 듯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제 이곳에 미련으로 남을 만한 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후 그녀는 근처 쓰레기장으로 가 아까 갈기갈기 찢었던 그와 그녀의 추억 일부를 아무런 미련 없이 쓰레기통 안에 버렸다.
마음이 순식간에 홀가분해졌다.
강하나는 손을 한번 털고는 택시 어플로 근처에 있는 택시를 불렀다.
그때 알림음이 울리고 서다은으로부터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강하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에는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그녀가 보낸 건 사진이었고 사진 속에는 아까 박지헌이 보여줬던 [하나 사랑 재단]의 계약서가 찍혀있었다. 다만 서다은이 보낸 건 첫 장이 아닌 마지막 장이었다.
“재단 투자자가... 서다은?”
그랬다. 투자자 이름을 적어야 하는 공간에 적힌 건 난데없은 서다은의 이름이었다.
그때 또다시 알림이 울리고 이번에는 둘이서 함께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는 사진이 전송됐다.
[혹시 지헌 씨가 건넨 재단 계약서 보고 잠깐 설렜어요? 그런데 이걸 미안해서 어쩌나. 소유주는 강하나 씨지만 투자자는 나예요. 즉 나는 앞으로 강하나 씨 이름으로 편히 돈을 벌게 될 거란 뜻이죠.]
조롱 가득한 문자에 강하나는 싸늘하게 웃더니 이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나 사랑 재단을 지금 당장 처리해주세요. 내일부터 두 번 다시 내 귀에 들리지 않게요.”
“네, 알겠습니다.”
강하나는 더 이상 우유부단하고 상처만 받던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했다.
서다은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 그녀는 지금껏 박지헌 때문에 자신이 인기 배우로 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다 강하나가 뒤에서 박지헌을 이것저것 도와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택시가 도착하고 강하나는 빠르게 차에 올랐다.
그런데 그녀를 태운 택시가 움직이는 순간 마침 박지헌의 차량이 별장 앞에 멈춰 섰다.
“방금 택시에 탄 사람, 하나 아니었어?”
박지헌이 조수석에 앉은 비서에게 물었다.
“아닌 것 같은데요? 사모님이라면 지금쯤 집에서 대표님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으시겠죠.”
비서의 말에 박지헌은 안심하며 차에서 내렸다.
하긴 강하나는 어디를 가면 간다고 늘 그에게 미리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말도 없이 어디를 갈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박지헌은 한 손에 강하나를 위해 특별 주문한 반지를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뿌리째 뽑혀있는 회화나무가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깜짝 놀란 박지헌은 정원 청소를 하고 있는 도우미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이거 누가 뽑았습니까?!”
그러자 도우미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께서 새 묘목을 준비하신다고 사모님께서 뽑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가 이걸 뽑으라고 했다고요?”
도우미의 말에 박지헌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그때 2층 청소를 담당하던 도우미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오더니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마침 눈앞에 보이는 박지헌에게 말을 건넸다.
“대표님, 이거 두 분 웨딩 사진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