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매 순간이 설렘의 연속
성시연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 남자의 짙은 눈빛을 마주했다.
‘이 시간대에 자는 거 아니었어?’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통유리창 너머로 방안을 비추고 눈 부신 빛이 마침 강찬우의 몸에 드리워져 차갑기만 하던 이목구비가 은은한 금빛으로 감돌았다. 한결 부드러워진 그의 모습에 성시연은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섯 살 때나 이제 곧 다가올 25살이나 그녀는 늘 변함이 없었다. 이 남자를 바라보는 매 순간이 설렘의 연속이었다.
“너 신경외과잖아? 산부인과는 왜 갔어?”
강찬우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어제 왜 산부인과에 가서 이하윤과 마주쳤는지를 묻고 있었다.
성시연은 약간 멍해졌다. 그녀는 지금 너무 피곤한 나머지 대뇌가 정지될 것만 같았다.
별안간 눈앞이 캄캄해진 그녀는 당혹감에 휩싸여 강찬우의 손을 뿌리치고 계단 손잡이를 잡았다.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 너무 피곤해서 일단 좀 자야겠어요.”
말을 마친 후 분노에 찬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걸음을 휘청거리며 겨우 방에 돌아갔다.
방금 그녀는 난생처음 먼저 강찬우의 손을 뿌리쳤다. 전에는 늘 이 남자에게 내팽개쳐지는 처지였으니... 다만 그녀는 너무 지친 나머지 자신의 행동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후에 요란스러운 알람과 함께 깨난 성시연은 간신히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이대로 쭉 이불 속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오후에 1대1 피아노 레슨 알바가 잡혀있어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보수가 꽤 높아 알바 중에 최단 시간으로 돈을 버는 꿀 직업이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다 씻고 연하게 화장까지 마친 후 그녀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며 강찬우가 집에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가 있으면 성시연은 혹여나 반감을 살까 봐 무심코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웃기는 게 강찬우가 언제 한번 그녀를 미워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오늘의 아르바이트 장소는 그녀도 처음 가보는 곳이다. 차를 타고 30분 남짓 달리자 별장 한 채가 보였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부자거나 권력자들일 것이다. 그래서 아르바이트 비용도 다른 곳에 비해 좀 더 높은 편이다.
고용주의 집 문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자 곧장 40대로 돼 보이는 아줌마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수업하러 오신 선생님이시죠? 어서 들어와요.”
아줌마와 함께 안으로 들어갈 때 피아노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는데 전혀 리듬이 안 잡히는 걸 보아 초보자일 듯싶었다.
‘좀 더 공들여서 가르쳐줘야겠네.’
이렇게 생각하며 집안에 들어가 학생을 본 순간 성시연은 입이 쩍 벌어졌다. 고작 일여덟 살 돼 보이는 여자아이는 귀여운 외모에 핑크색 공주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저 하찮다는 듯한 표정은 뭘까? 성시연을 얕잡아보는 걸까?
“그쪽이 바로 오빠가 찾아준 피아노 선생님이에요? 아직 어려 보이는데 정말 피아노 칠 줄 알아요? 이건 우리 엄마가 물려주신 피아노예요. 가격도 비쌀뿐더러 내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요. 과연 그 두 손으로 내 피아노를 만질 수나 있겠어요?”
여자아이는 대뜸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이에 성시연은 늘씬한 손가락을 바라보며 겸손하게 답했다.
“그래도 이 두 손으로 피아노 칠 자격은 있을 텐데.”
아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썩 내키지 않은 듯 자리를 내주었다.
“그럼 한번 쳐보던가요.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돌려보낼 거예요. 난 예쁜 여자 딱 질색이거든요.”
성시연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이건 대체 칭찬일까 비난일까?
피아노 앞에 앉은 그녀는 건반 음색을 테스트해보았는데 확실히 모든 면에서 상태가 양호하고 그에 걸맞게 가격도 어마어마했다.
성시연은 너무 복잡한 곡으로 어린아이를 정복하고 싶지 않아 즉흥적으로 한 소절 연주했는데 그마저도 아이를 입이 쩍 벌어지게 했다.
옆에 있던 도우미 아줌마도 칭찬을 남발했다.
“역시 도련님이 모셔온 분이라 실력이 뛰어나시네요. 그럼 꼬마 아가씨는 선생님께 맡길게요.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이는 드디어 자세를 낮추고 겸손하게 말했다.
“선생님, 방금 연주한 곡은 제목이 뭐예요? 왜 저는 들어본 적이 없죠?”
이에 성시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목 없어. 그냥... 아까 생각난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을 떠올리면서 피아노에 마음을 맡긴 거야.”
“그럼 그 사람은 분명 선생님의 마음을 꾹 짓누르면서도 엄청 좋아하시는 분이겠네요?”
이때 갑자기 문 앞에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는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갔다.
“오빠! 나 이 선생님 좋아요. 선생님한테 피아노 배울래요!”
한편 고개를 돌린 성시연은 화들짝 놀랐다.
“진현수? 여기가 너희 집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