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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내가 동창회에 도착했을 때,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어있었다. 인파속에서 주한결은 둥근 테이블 앞에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머리 위의 샹들리에가 비추는 불빛이 그의 우뚝 솟은 콧날과 미간에 흩뿌려져 마치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신의 조각상같이 단정하고 냉엄보였다. 그의 옆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있었다. 무심하게 그녀의 등 뒤에 손을 올린 모습에는 애정이 가득 있었다. 진실 게임의 병입구가 그 여자에게로 향했다. 호기심이 많은 한 사람이 아부하는듯한 말투로 말했다. “자리에 있는 이성 중 한 명과 2분동안명키스하기!” 그 말에 여자는 부끄러운듯 고개를 숙이더니 조심스럽게 주한준을 향해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가련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주한준은 사람들에게 눈짓을 하며 조용히 말했다. “적당히 해, 애가 겁이 많아.” 주한준이 적당히 하라고 하니 당연히 그 여자를 더 난감하게 할 사람은 없었다.하지만 그래도 게임의 룰을 존중하기 위해 주한준은 눈앞에 있는 술을 마셨다. 감싸겠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호응 소리가 연달아 울렸고 아무도 구석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손목의 상처를 움켜쥔 채 조용히 등을 돌렸다. “어이 형수. 이제 온 거야?” 과 대표인 엄겨울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형수. 한때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 호칭이 지금은 유난히 우습게 들렸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고, 나는 입꼬리을 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랜만이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룸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울릴만큼 잠깐의 정적에 휩싸였다. 하긴, 지금의 주한준은 이미 자신의 인연을 찾았을 텐데 그의 뒤만 6년을 졸졸 따라다닌 호구를 신경 쓸 사람은 없었다. 나의 등장은 확실히 적절하지 않은 듯 했다. 하지만 그때, 주한준 옆에 있던 여자가 먼저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저 알아요. 남진아 선배 맞죠? 저희 과에서 모범생으로 유명했던 여신이잖아요!” 여자는 사랑스러운 외모에 말투도 몹시 부드러워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었다. “선배, 안녕하세요. 전 임지아라고 해요. 저도 컴공과예요.” 그녀는 자기소개를 하며 주한준을 쳐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오늘 진아 선배도 온다는 얘기 왜 안 해줬어요?“ 주한준은 담담하게 나를 보더니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말해서 뭐해?” 상관도 없는 사람. 주한준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렇지 않으면 꼬박 6년간 어떻게 정정당당하게 그의 곁에 있을 기회조차 없었던 걸까? 나를 위해 술을 막아주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우스운 건, 난 냉정하고 자제력이 강한 주한준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은 다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주한준과 임지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가장 앞쪽에 서 있었다. 여자의 귀여운 목소리가 나의 귓가에 들려왔다. “적당히 마시라니까, 지금 봐요. 괴롭죠?” 주하준의 대답은 만점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누구때문인데?” 임지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나 바래다주지 마요, 오빠. 걱정돼요.” 주한준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여자는 이내 울상이다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주변에 둘 뿐이라는 듯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고 마지막 줄에 있던 나는 한번 또 한번의 동정의 눈길을 받았다. 내 기분도 조금은 울적해졌다. 원래 오늘 동창회를 빌려 새로운 투자 인맥을 만날까했었는데, 이제 계획이 전부 어그러진 것도 모자라 밤새 우스갯거리나 되고 말았다. 엄겨울은 더는 보기 힘들었는지 나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미안, 한준이가 올 줄은 몰랐어.” 엄겨울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여태까지 이런 모임에는 안 왔던 애라.” 엄겨울의 말은 사실이었다. 동창회의 명단에 확실히 주한준은 없었다. 나는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괜찮아,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 앞으로 많이 부탁할게.” 엄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젝트 설명서는 내가 가지고 있다가 소식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 역시 돈 얘기가 감정 이야기보다 훨씬 쉬웠다. 한 시간 뒤, 나는 숙취해소제를 가지고 아파트 단지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눈앞에 익숙한 건장한 체구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주한준이었다. 손에 담배 한 개비를 끼우고 있었고 라이터는 허공에 떠 있었다. 짙은 푸른색의 스프라이트 넥타이는 느슨하게 목에 걸려 있어 조금 피곤해 보였다. 나를 보자 주한준의 눈빛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윽한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시선을 내리깐 나는 담담하게 시선을 거두고 손을 뻗어 층 버튼을 눌렀다.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별안간, 그림자가 덮치더니 짙은 술 냄새가 훅 끼쳤다. 허리가 감싸지더니 그대로 주한준의 품에 단단히 안겼다. 주한준의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지나, 여전히 날 걱정하는 거 맞지?” 주한준은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내 목덜미에 고개를 부비적거렸고 말투도 아부하듯 다정했다. 지난 6년간 전혀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문뜩 한 시간 전, 모임에서 임지아에게 다정하게 말하던 모습이 떠올라 순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걱정이라. 그가 걱정된다고 했던 사람은 임지아였다. 지나와 지아는 원래 발음이 비슷하기도 했다. 짙은 알코올 냄새가 그가 취했다는 것을 알려줬다. 나는 피곤함에 고개를 들며 그에게 귀띔했다. “미안, 난 임지아 씨가 아니야.” 나를 안고 있는 주한준의 팔이 크게 움찔했다. 시선이 맞닿은 사이, 나는 눈치껏 한편으로 비켜섰다. 시야 끄트머리에 주한준의 굳은 얼굴이 들어왔다. 분위기는 순간 어색해졌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나는 무표정하게 밖으로 나갔다. 은연중에 주한준의 은근한 눈빛이 느껴졌다. 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와 현관문을 닫으려는 순간, 별안간 달려 들어온 주한준은 나를 현관에 가뒀다. 주한준의 긴 다리는 조금 강제적으로 침략하고 들어와 순식간에 나를 그의 자그마한 공간 안에 가둬버렸다. “남진아, 여기 살아?” 주한준의 말투는 음산했고 온몸에서 한기가 흘렀다. 내가 지내고 있는 곳은 2년 전 우리가 함께 동거했었던 집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집주인이 단골이라고, 월세를 6만 원 깎아줬거든.” 6만 원은 회사인에게 있어 아낄 수 있으면 아끼는 게 좋은 금액이었다. 주한준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일부러야?” 나는 손을 뻗어 스위치를 켜며 이미 한바탕 뒤집어진 방을 보여주며 반문했다. “그래 보여?” 주한준이 좋아하던 시니컬한 톤의 인테리어는 이미 멤피스 톤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시선을 거둔 주한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잠시 멈칫하다 말했다. “이사 가. 모자란 돈은 내가 줄게.” 나는 주한준이 뭘 신경 쓰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전의 잤고 했던 구석구석들은 이미 전부 사라지고 없어진지 오래인 데다 앞으로 더는 올 일도 없지 않은가? 다음 순간 이어진 주한준의 목소리는 나의 의문을 해결해 줬다. “임지아가 위층에 살아.” 그렇구나. 참 공교롭기도 했다. 어쩐지 우연히 만날 수 있다 싶었더니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 방금 바래다주고 나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주한준도 참 고생이었다. “아주 간단한 문제네.” 나는 방 안의 낡은 시설들을 살피며 제안했다. “임지아 씨에게 더 나은 집을 마련해 주는 거야.” 주한준의 능력으로는 가장 번화한 구역의 최상층에서 밝아오는 야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최고급 아파트도 살 수 있었다. 그는 돈이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주한준은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듯 거절했다. “난 지아가 사람들에게 오해받게 하고 싶지 않아.” 그의 말투는 단호했다. 만약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 고고한 주한준이 누군가를 위해 이토록 세심하게 배려할 줄 안다는 건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마음 한구석이 벌에 쏘인 듯 은근하게 저릿해져 잠시 멈칫한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 이사하고 싶지 않아.” 이곳은 대학가 근처에 위치한 데다 물가도 쌌고 근처의 지하철역은 회사까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어 몹시 편리했다. 하지만 불필요한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이성적으로 말했다. “걱정 마, 임지아 씨와는 어떠한 접점도 만들지 않을 거니까.” ‘너와도, 마찬가지고.’ 나는 속으로 묵묵히 말햇다. “그 말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주한준은 나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낸 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조금 갑갑해졌다. 시끄러운 휴대폰 벨소리가 나의 사념을 깨웠다. 발신자는 사장이자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오영은이었다. “미리 준비 해, 내일 아침에 나랑 같이 새로운 투자자 만나러 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서른의 커리어 우면의 강인한 목소리가 마음속의 복잡한 잡념을 깨부쉈다. 매달마다 나오는 명세서를 떠올린 나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영은의 벤츠 G500이 영한 금융 빌딩 아래에 멈췄을 때, 나는 완전히 평정심을 잃었다. 영한 금융은 금융 업계의 새로 떠오른 다크호스로 창업자는 주한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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