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얼굴에 우유를 뒤집어쓴 여자가 또다시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장훈은 여자를 부축하고 티슈를 꺼내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우유를 닦아주었다. 닦다 보니 점점 아래로 내려갔고 뾰족한 턱과 목덜미를 지나다 보니 우유가 가슴께까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동작을 멈추었다.
뒤늦게 눈을 뜬 조수연은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보고 다급한 마음에 귀뺨부터 후려치려고 손을 뻗었다.
이장훈은 바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물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조수연이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 이거 추행이야! 어디서 이상한 짓거리 하고 있어?”
이장훈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다 젖은 티슈를 여자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거 좀 보고 얘기할래요? 넘어지는 거 부축해 주고 우유를 다 뒤집어썼길래 닦아주려던 건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사람을 이상한 쪽으로 몰고가네요?”
조수연은 티슈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다 벌어진 자신의 셔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당신 내 단추 왜 풀었어?”
이장훈도 짜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보세요. 그 단추 내가 푼 게 아니고 진작에 열려 있었거든요? 셔츠가 너무 작아서 단추가 터진 것 같은데요? 어쨌든 난 모르는 일이에요!”
조수연이 이를 갈며 이장훈을 노려보는 와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다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할아버지.”
수화기 너머로 조 회장의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중 나가라고 했더니 이 선생은 만났어?”
사실 조 회장의 주문은 조수연이 직접 구청 앞으로 이장훈을 마중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수연은 왠지 여자인 자신이 너무 적극적으로 나가면 그쪽에서 자신을 무시할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상대는 이혼남이라니!
그래서 자신은 여기서 기다리고 운전기사만 보낸 것이다.
조금 전에 운전기사가 도착했다고 문자했으니 아마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나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급히 말했다.
“도착했어요. 곧 올라가요.”
전화를 끊은 그녀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이장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변태 새끼,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참는 거야. 다음에는 나랑 눈도 마주치지 마!”
말을 마친 그녀는 ‘이장훈’을 마중하러 급급히 로비를 나갔다.
이장훈은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은 마음에 도와줬다가 변태로 오해나 당한 꼴이라니! 생각만 해도 어이없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호텔 직원에게 VIP룸 위치를 물은 뒤에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룸 안에 들어서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이장훈은 의아한 마음에 문을 열었다가 펼쳐진 광경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부모님과 어제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조태풍이 같이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입구에서 다툼이 있었던 여자도 안에 있었다.
조수연은 이장훈을 보자 놀라는 듯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변태 새끼! 여기까지 따라왔어? 경비! 경비!”
그녀는 앙칼진 목소리로 입구를 향해 소리쳤다.
조태풍은 화들짝 놀라며 손녀의 팔을 붙잡았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 저분이 바로 내가 찾던 이 선생이야!”
조수연의 얼굴이 당황함으로 바뀌었다. 그 대단하다던 이 선생이, 할아버지가 선택한 손주사위가 변태였다니…
이장훈에 대한 그녀의 첫인상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당장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이를 꽉 악물었다.
이장훈은 부모님 앞에서 조수연이 대놓고 변태라고 비난하자 다급한 목소리로 해명했다.
“저기, 말은 그렇게 하는 거 아니죠! 그쪽이 넘어지려는 걸 내가 부축한 거 뿐이잖아요. 우유를 얼굴에 뒤집어썼길래 좋은 마음에 닦아준 건데 어찌 사람을 이렇게 모함할 수 있어요!”
유옥란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들을 두둔했다.
“오해가 생긴 것 같네요. 수연 씨, 우리 장훈이 그런 애 아니에요. 겁도 많아서 여자 앞에 서면 말도 제대로 못하는 순박한 아이가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어요.”
조수연은 그 말을 전혀 믿고 싶지 않았다. 부모 눈에 안 착한 자식이 어디 있을까?
대낮에 여자의 셔츠 단추를 푼 사람이 변태가 아닐 리가 없었다.
조태풍은 손녀가 계속 말이 없자, 웃으며 분위기를 무마하려 나섰다.
“뭔가 오해가 생겼나 보네요. 젊은 사람들끼리 오해는 풀면 그만이죠.”
그는 잔뜩 화가 난 이장훈의 표정에서 오해라는 것을 확신했다. 만약 이장훈이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 역시도 손녀를 불구덩이에 떠밀 생각은 없었다.
조수연은 할아버지까지 그렇게 말하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순철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해는 풀면 되죠. 오늘은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도 애들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수연 씨와 조 회장님은 다 원한다고 했으니 우리도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오늘 바로 날짜를 잡아도 좋을 것 같네요.”
대화를 듣고 있던 이장훈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아버지, 어머니, 왜 저한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유옥란이 아들을 흘겨보며 말했다.
“너랑 무슨 상의를 해? 너 복받은 줄 알아.”
그녀는 어쨌든 이혼남에 애까지 딸린 아들이 조수연 같은 미인과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하늘에서 떨어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할 말을 잃은 이장훈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고민에 잠겼다.
조수연이 굉장한 미인이긴 하지만 그가 원하는 건 내면이 깨끗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오늘 만났는데 벌써 결혼 얘기가 오가는 이 상황도 당황스러웠다.
“우린… 서로 잘 알지도 못하고 조수연 씨는 방금 전에 저를 변태라고 오해까지 했잖아요.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조수연은 이장훈이 거절 의사를 밝히자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평소라면 남자들이 그녀에게 목매달고 그녀가 거절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대체 굴러온 복을 발로 차는 꼴이라니!
조태풍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수연이한테 회사에 적당한 일자리 하나 달라고 해서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요. 자주 만나다 보면 서로에 대해 알게 되겠죠.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이 들 때 결혼해도 늦지 않아요.”
결혼 얘기만 들어도 이장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직 이혼 서류에 잉크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또 결혼이라니!
아들의 생각을 눈치챈 이순철이 입을 열었다.
“장훈아, 나와 네 엄마는 네가 참 걱정이란다. 사람은 앞을 보고 살아야지. 난 네가 새 출발을 수연 씨랑 함께했으면 좋겠구나.”
머리가 하얗게 샌 유옥란도 간절한 눈빛으로 이장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장훈은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분명 그가 출소 이후에 이혼까지 당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시도는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할게요.”
그제야 이순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두 젊은이들이 시도는 해보겠다고 했으니 맞선은 성공한 셈이네요. 일단 약혼부터 하고 결혼 날짜는 천천히 상의해 보죠.”
조태풍은 드디어 병을 치료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시름이 놓였다.
“5월 지나가기 전에 약혼식부터 하죠? 5일 뒤, 어때요?”
이순철도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5일 뒤에 약혼하는 거로 하죠.”
두 주인공을 제외하고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장훈은 내일부터 태진그룹에 출근하기로 했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할지는 내일 다시 얘기하는 거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옆방.
김인영은 장명수와 룸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메뉴가 올라온지 얼마 안 돼서 김현화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혼 수속은 잘 마무리했어?”
“응, 마무리했어.”
김현화는 예상 외로 순조로운 진행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혼까지 했으면 유신이가 이장훈 그 녀석한테 맞은 일 이대로 넘어가면 안 돼. 명수한테 얘기해서 사람 좀 보내라고 해!”
김인영은 피멍이 든 김유신의 얼굴과 구청 입구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지금의 이장훈은 예전에 알던 그 자상하고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던 순박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이게 그의 본성인 걸까?
그녀는 한참 넋을 놓고 있다가 마지못해 말했다.
“엄마, 걱정 마. 유신이를 건드렸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