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허가윤은 나영재를 바라보며,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난 영재 씨가 하라는 대로 할게요.”
“영재 씨, 보여줄 수 있어요?” 안소희가 이쁜 두 눈을 살짝 위로 뜨며 물었다.
나영재는 안소희가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면서도 더이상 말하지 않았고, 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폰을 하나 들어 톡톡을 열어 그중의 한 대화창에서 채팅기록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안소희가 휴대폰을 받아들자,
채팅 기록의 내용이 바로 눈 앞에 나타났다.
나씨 사모님: 【당신이 날 도와 허가윤을 처리해주기만 하면, 내가 당신의 빚도 다 갚아주고 추가로 2억을 더 줄게.】
사고 낸 운전자: 【당신이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 내가 어떻게 믿어요?】
나씨 사모님: 【난 나영재의 와이프야. 나한테 2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사고 낸 운전자: 【그럼 당신을 한번만 믿도록 하죠. 혹시 돈 안 주면 난 정말 NA그룹에 가서 크게 난리 칠거에요! 난 어차피 잃을게 없어요!】
사고 낸 운전자: 【사진 보내줘요.】
나씨 사모님: 【사진】
나씨 사모님: 【깨끗하게 처리해】
안소희는 채팅 기록을 다 읽어보고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이게 다야?”
나영재는 위에서 안소희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눈에서 당황한 기미를 찾아볼려고 했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 그게 다야.”
“내가 한거 아니야.” 안소희는 휴대폰을 돌려주며 합리적으로 분석을 시작했다. “나사장님의 능력이라면 이 계정을 실명 인증한 사람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나?”
“계정이 신설 계정이라 실명 인증이 되어있지 않아.” 나영재 주변의 분위기가 좀 차가워졌다.
안소희: “로그인 ip 주소를 조사할 수 있어.”
나영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고, 시선은 그녀의 몸에 머물렀으며,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인상 속의 안소희는 머리가 이토록 좋았던 적이 없었다.
예전에 그녀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모든 일을 다 본인이 대신 해결해 줬는데,
지금은 왜 갑자기 사람이 아예 바뀐 것 같지?
“상대방이 ip주소까지 숨겼다고는 하지 않겠지?” 안소희는 한참이나 말이 없는 나영재를 보며 다시 얘기했다.
나영재는 대답은 하지 않고 단지 명령만 내렸다. “성진영, 기술팀 사람들에게 이 계정의 모든 로그인 ip주소를 조사해보라고 해.”
"네."
성진영은 휴대폰을 가지고 나갔다.
더 있다간 정말 사모님때문에 또 어떤 봉변을 당할가 두려웠다.
“정말 너 아니야?” 나영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고 눈빛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채팅 기록을 봤을 때, 그의 첫 반응은 당연히 안소희가 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요즘 그녀가 하는 행동들이 예전의 이미지들을 모두 뒤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돈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이 이혼할 때 많은 것을 요구하고,
부드럽던 성격이였던 그녀가 갑자기 그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안소희의 착함과 미련없는 이혼 결정이 일부러 꾸며낸건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
“여기서 내 시간 낭비할 바에 차라리 사고 낸 운전자가 오늘 가윤 씨의 이동 노선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를 알아보는게 낫지 않겠어?” 안소희는 명석한 대뇌로 분석을 할 뿐, 그와 싸우려고 하는 것은 아니였다.
나영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소희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뭐."
“이런 일이 생기면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하는게 맞는거야.” 안소희는 나영재에게 귀띔을 해줬고, 시선은 그의 잘생긴 얼굴에 머물렀다. “나처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잡아오지 말고.”
나영재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안소희란 걸 안 순간, 그의 첫 반응이 왜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아닌, 그녀를 찾아가는 것이였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나영재의 눈에는 전부 그녀의 모습만 비춰졌다. 평소에 잘 웃던 그녀의 눈이 가볍게 깜빡였고, 컬이 잘 살아난 눈초리는 나비 날개처럼 펄럭였다.
두 사람은 그냥 그렇게 서로 마주보면서 누구도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이때 허가윤의 목소리가 전해오자 나영재는 사색에서 벗어났다. “영재 씨.”
“왜 그래?”
“나 쉬고 싶어요.”
간단한 한마디였지만 누가 들어도 손님을 내쫓는 의도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안소희는 허가윤을 편히 쉬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몸을 일으켜 병상 앞으로 다가서 입술에 이쁜 각도를 그리며 말했다. “휴식하기 전에 저한테 사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뭐라구요?” 허가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나영재는 안소희의 뜻을 알아챘고 경고 섞인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안소희.”
“내 남편이랑 바람이 난 건 일단 그렇다 치죠. 어차피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깐요.” 안소희는 나영재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채로 천천히 말했다. “일단 오늘 아무 이유없이 저에게 누명을 씌운 것부터 얘기하죠.”
“미안해요.” 허가윤은 미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재빨리 사과했고, 두려움으로 인해 손가락에 불안하게 힘을 주어 꽉 쥐었다. “나씨 사모님이라고 적혀있어서 무의식적으로 그냥 당신인줄 알았어요.”
“그렇군요.” 안소희는 받은 그대로 돌려주었다. “전 또 당신이 나영재가 저랑 같이 쇼핑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일부러 자작극을 꾸며 차사고를 계획한 줄 알았죠.”
허가윤은 자기도 모르게 바로 변명했다. “제가 그런거 아니에요.”
“안소희!“ 그 말을 듣자 나영재가 바로 화를 냈다.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내? 농담도 못해?” 안소희는 성격 좋게 얘기하고 있었고 마치 정말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렇게 농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영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첫사랑을 감싸고 돌았다. “네가 가윤이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남에게 흙탕물을 뿌릴 필요는 없잖아. 뭐 내키지 않는게 있으면 차라리 나한테 화를 내.”
안소희의 입술이 아름다운 모양을 그리며 나영재를 빤히 바라보면서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했다. “농담 하나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사람이, 허가윤이 진지하게 내가 사람을 고용해 차사고를 꾸몄다고 얘기할 땐, 날 위해 이렇게 화를 내긴 했나?”
나영재는 잠깐 멈칫했고, 깊고 차가운 눈동자는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나영재.” 안소희는 정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분명 평범하기 그지없는 호칭에 불과할 뿐인데, 나영재의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이마살을 살짝 찡그리더니,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재빨리 떨쳐냈다.
“우리가 아직은 결혼증에 같이 이름이 찍혀있다고 내가 매번 일깨워줘야 하나?” 안소희도 감정이 북받쳤다. 강한 자존심이 없었다면, 그녀는 직접 나영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 앞에서 이렇게 다른 여자 편을 들면 자기도 기분이 상한다고.
“영재 씨.” 허가윤이 적절하게 입을 열었고, 사려 깊은 척하며 말했다. “이 일은 나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소희 씨랑 감정 싸움 하지 말아요.”
안소희는 정말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원래는 얕은 수나 쓰는 허가윤이랑 딱히 엮이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매번 자기 머리 꼭때기에서 놀아나는 모습을 계속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 집안 일이에요. 언제부터 허가윤 씨가 우리 집안 일에 참견할 자격이 생긴건가요?” 안소희는 담담한 목소리로 가볍게 얘기했다.
“난 그저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우린 지금 당신때문에 싸우는거에요.”
“미안해요.”
“미안하단 말 한마디로 모든게 해결될 것 같으면 경찰이 왜 필요하겠어요?”
“그만해!” 나영재는 짜증을 내며 안소희를 끌어당겨 밖으로 나갔다. 다만 이번에는 손에 들어간 힘이 선명하게 약해졌다. “따라 나와.”
안소희도 더이상 머무르지 않고,
본인의 가방을 챙겨 나영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나영재는 그녀를 복도 끝까지 끌고 간 후, 마음 속의 모든 감정을 억누른 채 다시 냉정한 태도로 회복하고 말했다. “뭐 하려는 거야?”
"싸우려는 거야."
"......"
“상간녀라고 욕하려고.”
“가윤이는 그런거 아니야.”
“그럼 내가 상간녀야?”
“아니야.”
“그럼 누가 제3자인데?”
안소희의 질문에 나영재는 답하지 못했고,
분위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눈을 낮춰 안소희에게 뭐라고 설명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정교한 얼굴에는 혐오감이 가득했고, 맑은 두눈에는 예전의 온화함이 없었다. 한참을 참고 있던 나영재가 갑자기 한마디 했다. “너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