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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강성, 늦은 저녁, 로얄 가든 별장 지역. 넓고 밝은 거실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고, 그 앞에는 이혼 합의서가 놓여 있다. 반듯하게 다려진 양복을 입은 남자는 완벽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으나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어, 그 주변에는 강한 위압감이 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은 맞은 편에 앉아 한마디도 안하고 있는 여자에게 멈췄다. 그녀의 눈은 마치 어두운 밤처럼 깊고 짙다. "월요일에 이혼하러 가자." 나영재는 한치의 여지도 없이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혼 합의서에 적힌 보상 외에, 더 필요한게 있으면 다 얘기해." "왜 이렇게 갑자기?" 안소희의 목소리는 아까보다도 더 낮아졌다. "허가윤이 돌아왔어." 나영재는 간단히 한마디 내뱉었다. "그래." 허가윤이 누군지 안소희는 잘 알고 있기에, 잠깐의 침묵 후 바로 동의했다. 순간 나영재는 잠깐 멈칫했다. 아마도 안소희가 그렇게 쉽게 동의할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혼 합의서를 펼치고 그 위에 적힌 촘촘한 문구들을 보노라니, 안소희는 나영재와의 옛 추억들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2년 전에 강성의 평안클럽에서 만났다. 한창 깊은 고민에 휩싸여 있던 안소희는 마침 실연당한 나영재를 만나게 되었고, 술 몇잔을 기울이니 두 사람은 마치 소울메이트를 만난 듯이 유쾌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막장 같은 하루 밤은 없었고, 둘은 술을 마시고는 각자 자리를 떠났다. 다시 그를 만나게 된 건, 그날 밤으로부터 사흘 뒤였는데, 나영재는 비서와 함께 나타나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얘기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에 동의했다. 혼인신고를 한 뒤, 나영재는 실제로 안소희에게 아주 잘해줬다. 그녀를 살뜰히 보살펴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최대한 빨리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왔으며, 그녀가 아플 때엔 직접 약을 준비하고, 머리를 감으면 알아서 머리까지 말려줄 정도로 둘은 사이가 좋았다. 반년 전 그가 한통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한통의 전화 이후로 그는 달라졌다. 점점 더 냉정하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더이상 친절하지 않았다. 안소희는 그날에야 나영재가 자신과 결혼한 것도, 결혼 후 자신에게 그토록 친절했던 것도 모두 본인이 나영재의 첫사랑인 허가윤과 조금 닮았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안소희는 입술을 오므리다가 나영재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방금 내가 뭘 원해도 다 보상해줄 수 있다고 했지?" "그래." 나영재는 간결하게 답했다. “어떠한 보상도 다 가능해?” 얼굴을 들어 나영재를 바라보는 안소희의 정교한 이목구비는 마치 예전의 생기를 잃은 듯 보였다. 이런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니, 나영재의 마음 속에도 조금의 미안함이 생겨버렸다. “그래.” 그래서 나영재는 맘 속으로 결정했다. 안소희의 요구가 너무 무리한 것만 아니면 최대한 만족해주기로. 함께 한 1년 동안 그녀가 자신에게 확실히 잘해준 것은 사실이다.. “그래, 그럼 차고에 있는 제일 비싼 슈퍼카를 나한테 줘.” “그래.” “교외에 있는 별장 한 채도.” “그래.” “결혼 후 당신이 번 돈도 우리 둘이 반반으로 나눠.” 여기까지 듣다보니, 그전까지만 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던 나영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한번 입을 열어 안소희에게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결혼 후 재산은 부부 공동재산이야. 내가 계산을 좀 해봤는데, 당신이 투자나 재테크로 번 돈 빼고도 결혼 후 월급이랑 회사에서 나눠준 수익금들만 해도 천억이 넘어.” 안소희는 정색하면서 얘기하였고, 전혀 농담하는 분위기가 아니였다. “많이도 말고 나한테 40%만 줘.” 나영재: “???” 안소희가 또 이어서 말했다. “물론 내 수입의 40%도 당신한테 줄게.” “안소희!” 나영재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방금은 분명 자신이 미쳐서 안소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전에는 왜 안소희가 이토록 돈을 좋아한다는 걸 몰랐지? 안소희는 얼굴을 들어 나영재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안돼?” 당연히 안되지! 나영재는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바로 부정해버렸다. “안되면 말고.” 안소희는 손에 들고 있던 팬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다음에 당신네 집안 어른들이랑 만날 때, 직접 만나뵙고 당신이 혼인 존속 기간에 정신적인 외도를 한 일에 대해 얘기하지 뭐. 그분들이 내게 힘을 실어줄거라 믿어.” 나영재의 분노로 인해 주변의 공기는 마치 얼어붙은 듯 하고, 그의 눈빛은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안소희가 이렇게 두 얼굴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럼 지금까지의 모습은 다 꾸며낸 모습이란 말인가. “정말 이런 태도로 나랑 얘기할래? 확실해?” “확실해.” 안소희는 눈빛으로 나영재와 당당히 맞섰다. 나영재가 협박 당하는 걸 제일 싫어한단 걸 잘 알지만, 뭐 어차피 본인도 외도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니까. “그래.” 나영재는 눈빛과 낯색이 어두워진 상태로 말을 이어갔다. “줄게. 그런데 만약 이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 잘 알고 있을거라고 믿어.” “나사장님,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건가요?” 안소희는 의자에 기대에 앉았고, 까만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진지함이 옅보였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나영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결혼 생활 2년 동안 안소희는 이해심이 넓고, 순종적이며 부드러운 여자였다. 단 한번도 이렇게 자신과 맞서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아니야.” 나영재는 이미 뒷수습을 할 수단을 다 생각해 두었고,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집, 차, 돈 다 줄게. 월요일에 이혼해.” 안소희는 눈동자를 한 번 굴리더니 천천히 얘기했다. “그리고 한가지가 더 있어.” “말해.” 나영재의 인내심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일 나랑 같이 쇼핑해.” 안소희는 마치 그의 몸에서 풍기는 한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쇼핑 마치고 나면 나랑 같이 본가로 가서 어른들한테 우리 이혼한다고 얘기해. 이혼 사유는 내가 더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거야.” “그래.” 나영재는 이에 동의했다. 얘기를 마친 후, 나영재는 한 순간도 이 곳에 있고 싶지 않아, 온 몸에 한기를 풍기며 밖으로 나갔다.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영재는 안소희가 이혼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을 좀 두고 천천히 적응할 수 있게 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힘들어하기는 커녕, 안소희는 오히려 그와 일찍 이혼해 그의 재산을 분할하기를 간절히 바래온 사람 같았다. 안소희가 그의 이런 생각을 알았다면 아마 "내가 그깟 돈 탐내기라도 할가봐?"라며 헛웃음을 쳤을 것이다. "오늘 밤엔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내일 아침 9시에 쇼핑하러 가게 마중 올게." 문 앞까지 간 나영재는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말했다. "가고 싶은 곳들을 미리 정리해 놔." "지금 허가윤한테 가는 거야?" "너랑은 상관 없어." "난 배신 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안소희도 이미 그와 정면으로 맞선 김에 더이상 자신을 감추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이혼하기 전까진 허가윤이랑 침대까지 올라가지 않는게 좋을거야." 나영재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발길을 돌려 안소희 앞에 멈춰선 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안소희는 결코 그의 저기압때문에 영향 받지 않았고, "왜? 설마 이틀도 기다리기 힘든거야?"라고 말했다. "네 맘속에 원망이 있다는 걸 알아. 일부러 이런 말로 날 자극하지 않아도 돼." 나영재는 화내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약 그가 이런 대우를 받았다면 아마 이보다 더 극단적이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혼할 뿐, 적이 되는 건 아니야 ." 안소희: "......" 염치가 없는 건가? "일찍 쉬어." 이 말을 남기고 나영재는 떠났다. 문이 닫히는 그 순간, 이혼 합의서는 조용히 탁자 위에 놓여져 있었고, 안소희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반년 전, 본인이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이란걸 안 순간, 그녀도 힘들어 했었다. 나똥개는 그녀의 24년 인생에서 첫사랑이었고, 그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과묵한 것 외에 모든 면에서 완벽한 남편이었다. 인내심 있고 부드러웠으며 그녀를 걱정시키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 속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비록 받아들이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먼저 그에게 이혼하자고 얘기하면서 그더러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가라고 했고, 그를 놓아주는 걸 택했다. 그러나 나똥개는 동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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