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차 안은 몹시 조용했고, 백지연은 조급했던 탓인지 목소리가 커 서정희는 “정한” 두 글자를 똑똑히 들었다.
그녀는 임신 보고서를 받은 날 희망을 가득 품은 채 염정훈의 품에 들려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훈아, 너 이제 아빠가 될 거야! 우리 아이가 생겼어! 나 아기 이름도 다 생각해놨어. 여자애면 염희아라고 하고 남자애면 염정한으로 하자. 우리 둘 이름 따서 말이야. 어때?”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길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염정훈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명쾌하게 대답했다.
“염정한이야.”
“개자식!”
서정희는 손을 들어 뺨을 내리쳤다. 이번에 그는 피하지 않은 채 그대로 맞았다.
“어떻게 그 여자가 낳은 아이에게 우리 아이의 이름을 붙일 수가 있어!”
아이는 서정희의 마지노선이었다. 눈물이 줄 끊어진 진주마냥 후드득 떨어졌다. 서정희는 미친것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 악마 같은! 왜 내 아이가 죽어야 하는 건데, 왜 죽은 사람이 네가 아닌 건데!”
이성을 잃은 서정희는 염정훈의 몸을 세게 내리치고 내리쳤다.
“걘 그 이름으로 불릴 자격 없어!”
염정훈은 그의 양손을 잡은 채 진상정에게 지시했다.
“해경 별채로 돌려.”
서정희는 더욱더 흥분했다.
“곧 있으면 법원이야. 가려거든 이혼하고 가.”
“애가 고열이래, 반드시 당장 가야 해.”
서정희가 분노하며 말했다.
“우리 아빠는 아직도 병원에 누워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병원비 재촉하는 간호사 때문에 병원에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있어! 당신 애 목숨만 목숨이고 우리 아버지 목숨은 목숨도 아니야?”
서제평 이름을 꺼내자 염정훈의 얼굴에 냉기가 가득했다.
“서제평이 정한이랑 같다고 생각해?”
화가 치민 서정희는 다시 달려들어 세게 뺨을 내리치려 했지만 양손이 단단히 잡혀 있었고 염정훈이 그녀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적당히 해!”
서정희는 차가 방향을 바꾸는 것을 쳐다봤다. 이 골목만 지나면 법원이었는데 말이다.
염정한 서정희가 다시 반항하는 걸 막기 위해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 예전에는 더없이 의지했던 품이 이제는 그녀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염정한은 힘이 아주 셌고 몸이 허약해진 그녀는 벗어날 수 없어 그저 무력하게 화만 냈다.
“그렇게 백지연을 사랑해?”
염정훈은 조금 멍해졌다. 서정희를 안은 순간 그는 그제야 그녀가 조금 마른 것이 아니라 1년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옷 위로도 뼈가 느껴졌다.
한때 애지중지하며 예뻐했던 꽃이 이제는 점차 메말라가고 있었다. 이게 정말로 그가 바라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 무섭게 머릿속에는 처참하게 죽은 여자의 시신이 떠올라 서정희의 허리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두 눈에 안타까움은 사라지고 오롯이 끝없는 냉기만 남았다.
“서정희, 한번만 시끄럽게 굴었다간 지금 당장 서제평의 산소 호스를 끊는 수가 있어.”
서정희는 양손으로 그의 옷자락만 꽉 움켜쥐었다. 눈물이 그의 옷자락을 적셨다.
분명 더는 그녀를 울리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지금 서정희가 흘리는 모든 눈물은 다 그 때문이었다.
차안의 정적은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진정한 서정희는 염정훈을 밀쳐내고 똑바로 앉았다.
서정희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네가 네 아들 보러가는 건 자유야. 하지만 그 일로 우리의 원래 계획을 망쳐선 안 돼. 내가 계속 매달릴 걱정 안해도 돼. 이 결혼,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나는 꼭 해야겠어. 난 쓰레기를 줍는 버릇따윈 없거든.”
쓰레기라는 말을 들은 염정훈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서정희는 그를 무시한 채 말했다.
“인정해, 과거의 난 너무 순진했어. 너에게 말도 안 되는 환상을 품었으니. 하지만 난 이제 다 깨달았어. 붙잡을 수 없는 모래알 같은 거면 그냥 놓아버리는 게 낫지! 나한테 돈 줘. 나중에 언제 시간 나면 남은 절차 밟는 걸로 해. 언제든 부르면 당장 오겠다고 약속할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내가 주기 싫다면?”
서정희는 염정훈의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방금 울었던 눈동자는 마치 비 내린 뒤의 푸른 숲같이 유난이도 밝았고 투명한 한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 지금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 거야. 아버지를 구하지 못한다면 나도 살아있을 필요 없어.’
염정훈은 수표를 거내 연달아 숫자를 적은 뒤 건네주었다.
“나머지 10억은 이혼한 다음에 송금해주지.”
서정희는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내가 너와 이혼을 안하겠다고 할까 봐 그렇게 겁이 나? 걱정 마, 너 같은 남자는 1초만 같이 있어도 역겨우니까. 차 세워요..”
그녀는 수표를 쥔 채 차문을 쾅 닫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드디어 아버지를 구할 수 있었다.
수표를 교환한 서정희는 곧바로 병원비부터 전부 결제한 뒤 그 다음으로는 진영이 그녀에게 준 주소로 향했다.
그곳은 사립 프리미엄 묘지로 그 안에 묻힌 사람은 부자가 아니면 권세가들로, 염씨 가문 여사님도 이곳에 묻혀 있었다. 서정희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리시안셔스를 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정희는 새로운 묘비를 발견했고, 새 무덤 주위에는 매화 나무가 빙 둘러져 있었다.
매화 나무는 이미 꽃봉오리르 틔워내고 있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으면 꽃들이 만개할 것이다.
차가운 묘비에는 낯선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염화진의 묘.”
그녀는 염정훈이 동생을 몹시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동생을 잃어버린 뒤 여동생은 그의 역린이 되어 아무도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어 아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화진, 이것이 이름인 걸까? 서정희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묘비 위에 있는 사진을 봤다. 아마 잃어버리기 전인 5, 6살 정도의 사진이었다. 핑크빛의 말랑말랑한 얼굴에서는 언뜻 염정훈의 모습이 보였다.
서정희는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없어,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 유일한 단서로 삼았다.
그녀는 여사님을 구매한 리시안셔스를 내려놓은 뒤 화진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화진아, 나는 서정희라고 해. 살아있다면 날 새언니라고 불러야 했겠네. 아니 전 새언니라일라나. 미안, 이런 방식으로 인사하게 돼서. 내가 널 죽인 범인을 반드시 알아내줄게…”
여사님의 묘는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진 속의 여사님은 인자하게 당시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정희는 주머니에서 아침에 구운 고구마를 꺼내 묘비 앞에 내려놓았다.
“할머니, 제가 왔어요. 또 겨울이네요. 할머니가 고구마를 뺏지 않으시니 고구마도 맛이 없네요.”
서 있다가 지친 서정희는 묘비 옆에 쭈그려 앉아 여사님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과거를 회상했다.
“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그 아이를 지키지 못 했어요. 하지만 염정훈 그 뻔뻔한 자식이 염 씨 집안의 대는 이어주었으니, 대가 끊길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할머니, 그 사람 변했어요. 더는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니에요. 전에 염정훈은 저를 위해 모든 비바람을 막아주겠다고 했지만 지금의 제가 겪는 모든 비바람은 다 염정훈이 가져 온 것들이에요.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신다면, 절대로 절 이렇게 대하게 가만 두지 않으셨겠죠.”
서정희는 힘겹게 웃었다.
“할머니, 저 염정훈과 곧 이혼해요. 전에 저한테 만약 염정훈이 절 괴롭히면 죽어서도 관짝 뚜껑을 열고 기어나와 뒷통수를 때릴 거라고 하셨잖아요. 저 이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어요.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제가 내려가 놀아드릴게요. 그때 저희 같이 때리러 가요. 네?”
“할머니, 죽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어둡지는 않아요? 벌레가 절 물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할머니, 제가 돈이라도 많이 태워드릴 테니 저 대신 보관 좀 해주세요. 이제 제가 내려가면 저한테 300평 짜리 대저택 하나 사주면 안 돼요?”
“할머니, 너무 보고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