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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장

염정훈은 나름 크지 않은 아파트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곳곳에 서정희의 그림자가 가득햇다. 그러다 방안에 놓인 아기 침대를 바라봤다. 그것은 그녀가 신혼집에서 유일하게 가져온 물건이었다. 그것을 보자 염정훈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서정희가 뛰어내렸을 때 자신이 망설임없이 따라서 뛴 순간 그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염정훈은 서정희를 아무리 미워해도 그녀에 대한 사랑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애정과 증오라는 복잡한 감정이 한 데 뒤엉키자 그것은 가시 돋힌 끈처럼 두 사람을 단단히 얽맨 채 둘 다 피범벅이 되어서도 풀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서정희를 심연으로 빠트렸지만 그 역시도 절벽 끄트머리에서 힘겹게 흔들리고 잇었다. 염정훈은 침대 위의 인형을 들어올렸다. 2년 동안 이어진 수백개의 밤마다 서정희는 이 인형을 안아야만 잠에 들 수 있었다. 만약 그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였을 것이다. 서정희, 매번 그 이름을 읽을 때면 입가에는 여전히 그녀를 향한 수천 수만 가지의 애정이 묻어 있었다. 염정훈은 서정희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욕실에서 한참을 진정한 끝에 서정희는 드디어 좀 나아졌다.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식은 땀에 잔뜩 젖은 몸을 이끌고 거실로 향했다. 그토록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염정훈이 진작에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든 서정희의 눈에 베란다에 기대 있는 남자가 보였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불꽃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했다. 담배를 전보다 훨씬 더 많이 피는 것 같았다. 염정훈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에 서정희는 깜짝 놀랐다. 아니면, 자신을 짓밟으려 기다리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서정희는 눈동자에 빛을 잃었다. 따듯한 물을 따라 목을 축인 서정희는 느릿한 걸음으로 염정훈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할래, 침대로 갈래?” 차가운 서정희의 말투는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창백한 서정희의 얼굴을 본 염정훈이 담배 연기를 뱉었다. “네 눈엔 내가 욕구 불만으로 보여?” “하지 않을 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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