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서정희가 그 사람을 언급할 때의 목소리는 전부 다 내려놓은 듯 평온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을 했던 사람이 어디 내려놓는다고 쉽게 내려놓아질리 없다는 걸 임성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상처를 숨긴 채 사람이 없을 때나 스스로 핥을 뿐이었다.
임성결은 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버님 수술 비용 아직 지급 못 했지? 친구한테서 돈 빌린 거로 생각해. 나중에 갚아.”
그는 서정희가 여자애 혼자 돈 벌기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 전에 몇 번이고 도움의 손길을 건넸지만 서정희는 전부 거절했었다.
서정희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선배.”
“정희야, 아버님의 병이 중요하지, 설마 너 그 쓰레기한테 모욕당하면서도 내 호의를 거절하려는 거야? 난 아무런 조건도 없어. 그냥 순전히 널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야. 우리 집이 비록 염씨 가문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집안은 아니라는 건 알잖아. 이정도 돈은 나한테 별것도 아닌 돈이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서정희는 양손으로 물컵을 감싸 쥔 채 그를 쳐다봤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보는 사람이 다 마음이 아팠다.
“선배, 선배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겐 나중이 없어요.”
이 인정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그녀는 갚을 수가 없었다.
링거의 수액이 바닥을 보이자 서정희는 단호하게 바늘을 뽑았다. 면봉으로 지혈하지 않은 탓에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서정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선배, 돈은 걱정하지 마요. 이혼 도장만 찍으면 저한테 20억을 주기로 했어요. 아버지 어제 수술했으니 저 병원에 보러 가야 해요.”
서정희는 고집이 센 성격이었다. 당시에 천재라고 칭송받던 그녀가 왜 학업을 때려치우고 결혼을 하러 갔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서정희의 담당 교수도 매번 자신과 밥을 먹을 때면 아쉬움을 토로했다. 얼마나 좋은 싹이었던가. 누가 그 싹을 뽑은 것인지 참 안타깝다며 한탄했다.
자신이 바래다주겠다고 말할 걸 예상한 듯 서정희는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차 도착했어요.”
임성결의 방법을 전부 막아버렸다.
서정희가 외투를 걸치고 손을 손잡이에 올렸을 때 임성결이 입을 열었다.
“정희야. 모든 걸 버리고 그 사람과 결혼한 걸 후회한 적 있어?”
후회라…
염정훈은 서씨 집안을 망쳤고 아버지는 충격을 받은 데다 교통사고까지 나 병상에 누워있고 자신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잃었다.
그녀는 후회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요트 사고가 벌어졌던 그 해, 폭풍우 속에서 그녀를 끌어올렸던 남자가 떠올랐다. 바로 그녀가 학교에서 한 번 만난 적 있는 흰 옷차림의 소년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꾹 참으며 말했다.
“없어요.”
철컹하고 문이 닫혔다. 조용히 떠나는 그녀를 눈으로 배웅하는 임성결은 속이 복잡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서재평은 여전히 중환자실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멀리서만 그를 볼 수 있었다. 묻고 싶은 말이 목에 턱 걸렸다.
서정희의 기억 속 서제평은 젠틀하고 점잖은 남자로, 부모님은 이혼하기 전 서로 심한 말 한 번 하지 않았었다.
변선희가 떠난 뒤에도 그동안 재혼을 하지 않았고, 일 외의 시간은 전부 그녀의 곁에 있어 줬다.
염정훈이 번마다 아버지를 꺼내는 걸 보면 그가 진정으로 미워하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예전에 사이가 좋았을 때 그에게 어렸을 때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덕에 그의 어머니는 충격에 가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해 현재는 해외에 있다고 했다.
그 잃어버린 동생과 서제평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서정희는 아버지 곁의 부하에서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그녀는 기사 장건한과 집사 김준겸의 집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버지를 평생 따랐던 사람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으면 해외로 떠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진상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아직 기절을 한 채 깨어나지 않고 있어 그녀는 완전히 갈피를 잃은 채 이튿날 해가 뜰 때까지 밤을 새웠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 도무지 우연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게 분명했다.
서씨 집안 쪽으로는 정보를 알 수 없었다. 서정희도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곧바로 단서를 염정훈의 기사인 진상정과 비서 진영을 겨냥했다.
손목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7시였다. 이 시간이면 분명 염정훈을 데리러 가는 길일 테니 서정희는 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한참을 울리고 나서야 연결되었고, 늘 그렇듯 그녀를 향해 예의를 차린 목소리였다.
“사모님.”
오랜만에 그 호칭을 듣자 서정희는 시큰함을 누르며 말했다.
“진 비서님, 염정훈과 이혼하기로 약속했는데 저도 같이 태워다줄 수 있어요?”
상대는 침묵했다. 그들도 염정훈과 마찬가지로 예기치 못한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서정희는 서둘러 한 마디 보충했다.
“오해하지 마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오늘 또 예기치 못한 일로 이혼하지 못하게 될까 봐 그래요. 아버지 병원비도 아직 내지 못해서 저…”
인간적으로 그녀는 진씨 형제와 사이도 괜찮았고 단 한 번도 두 사람에게 각박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조금 저자세로 부탁하니 진영은 곧장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사모님, 어디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
서정희는 그들과 가장 가까운 주소를 불렀다. 이곳은 해경 별채로 갈 때 반드시 지나게 되는 길이었고, 해경 별채는 백지연이 사는 곳이었다.
비록 서정희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염정훈은 몇 번이나 언론에 여기서 밤을 보내는 것이 찍혔었다. 자신과 헤어진 그 몇 개월 동안에도 이곳에 지냈을 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저희 산중로에 거의 다 와 가는 중이라 한 2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서정희는 조금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산중로?
그곳은 염정훈의 집과 가까운 곳이었다. 설마 두 사람 같이 살지 않는 건가?
서정희는 이내 그 생각을 떨쳤다. 두 사람이 함께 살든 아니든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진상정은 빠르게 도착했다. 진영은 늘 그렇듯 공손하게 차 문을 열어줬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모님.”
서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탔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어요.”
진중한 진영에 비해 진상정은 많이 활발했다.
“이렇게 추운 날에 왜 더 주무시지 않고요? 해도 제대로 안 떴는데요.”
진영이 그런 그를 향해 눈을 흘기자 진상정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서정희는 차에 탄 뒤 슬픈 분위기를 조금 더 물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에 전 염정훈의 마음이 갑자기 변한 건 백지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저 여자 하나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은 염정훈 곁에 있으니 동생에 대해 알고 있겠죠.”
“끼익!”
차가 급정거하며 진상정은 손을 핸들에서 떼며 얼른 손을 저었다.
“사모님,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진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모님도 아시겠지만 대표님에 대해선 저희는 늘 더 묻지 않아요. 우리가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설령 안다고 해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 양해해 주세요.”
서정희는 양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눈물이 손가락 틈으로 흘렀다.
“제가 이러면 두 사람 난처해질 거 알아요. 하지만 저 이제 더는 방법이 없어요. 염정훈은 말해주지 않고 아버지는 막 수술을 마치고 아직 깨어나지도 못하시고 계세요. 지금 집안은 완전히 몰락해 모든 단서가 끊겼어요. 저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는 게 이대로 밤낮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요.”
“사모님, 아가씨 일은 대표님의 역린이라 저희도 아는 게 얼마 없어요.”
서정희가 계속 부탁할 걸 예상한 듯 진영은 종이에 주소를 적었다.
“사모님, 그동안 알고 지낸 정을 봐서 여기까지만 도와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