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변선희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염정훈을 쳐다봤다. 그녀는 염정훈이 결혼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염정훈 씨, 저희는 해외에서 오래 지내느라 국내 소식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제 딸과 무슨 사이예요?”
담담한 눈빛을 한 염정훈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관계가 있다고 해도 지나간 일입니다. 이혼 절차를 밟고 있거든요.”
서정희는 그동안의 진심이 결국에는 그가 무심하게 뱉는 지나간 일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분노가 치미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보다는 가슴이 차갑게 식는 것이 더 컸다. 얼마나 눈이 멀었기에 저런 짐승을 보물로 여겼던 건지 속이 쓰렸다.
서정희는 반지 케이스를 꺼내 염정훈의 이마를 향해 세게 내던졌다.
“이 망할 쓰레기 자식. 내가 평생 제일 후회되는 게 바로 너랑 만난 거야. 내일 아침 9시에 법원에서 봐. 안 오면 넌 개자식이야!”
케이스는 그의 이마에 부딪힌 뒤 바닥에 떨어졌다. 반지가 발 쪽으로 굴러왔지만 이번에 서정희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반지를 밟은 뒤 문을 박차고 나갔다.
2년 동안 서정희는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다. 이번 일은 마치 낙타를 짓누르는 마지막 지푸라기 같았다. 서정희는 결국 얼마 도망가지 못한 채 그대로 길가에 기절했다.
하늘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은 마치 그녀를 향한 이 세계의 적의 같았다.
그녀는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으로 가득한 세상에 그녀는 딱히 미련이 남지 않았다.
다시 깨어났을 땐 낯선 방이었다. 밝은 노란색의 전구가 어둠을 쫓아냈고 방안은 봄처럼 따듯했다.
“깼어?”
눈을 뜬 서정희는 임성결의 부드러운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선배가 날 구해준 거예요?”
“퇴근길에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게 보이길래 데려왔어. 옷이 젖었길래 고용인에게 갈아입혀달랬어.”
남자의 눈빛은 맑고 깨끗했고 조금의 흑심도 없이 당당했다.
“고마워요, 선배.”
“죽 끓였어. 우선 따뜻한 물부터 마셔.”
서정희는 이불을 제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괜찮아요, 선배. 시간도 늦었는데 폐를 끼치면 안 되죠.”
몸이 허약해진 서정희는 발끝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질 뻔했고 임성결은 재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 그에게 풍기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그녀의 집에 있는 것과 같은 냄새였다. 예전에 염정훈의 몸에서도 이런 냄새가 났다.
염정훈을 떠올리자 또 찢길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너 지금 몸이 너무 약해. 좀 더 오래 살고 싶으면 더는 무리하면 안 돼.”
임성결이 부드럽게 말했다.
“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서정희의 빛을 잃은 두 눈동자에 그제야 희망이 피어났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서정희는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는 남자를 쳐다봤다. 사실 그녀는 임성결과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기껏 해 봐야 그녀가 대학교 1학년이고 임성결은 4학년이라, 학교에서 우수 학생으로 선정되었을 때 임성결이 그녀에게 상을 건네준 적이 있는 게 전부였다.
그때의 그는 이미 유명 병원에서 실습하고 있어 학교에 있는 시간이 몹시 적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병원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고 서정희는 그때부터 그와 연락이 많이 지기 시작했다.
이런 관계에 그녀가 계속해서 임성결을 귀찮게 할 이유가 못 됐다.
식사를 마치고 위약을 먹자 서정희는 그제야 속이 좀 괜찮아졌다.
임성결은 다시 한번 항암치료에 관해 이야기했다.
“현재 의학은 몹시 발달했어. 넌 그저 중후기일 뿐이야. 어떤 암 환자는 암 말기에도 살아남기도 해. 넌 너 자신을 믿어야 해. 항암은 아주 효과가 좋은 치료 수단이야.”
서정희는 고개를 떨궜다.
“저도 의대에 다녔어 항암 치료의 장점과 부작용에 대해 알아요.”
임성결은 다시 한 번 더 설득했다.
“항암 수술은 치료 확률이 아주 높아. 부작용도 크긴 하지만, 그걸 견뎌낼 자신만 있다면…”
서정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는 눈물만 고여 있었다. 그녀는 온 힘을 들여서야 겨우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달싹이는 입술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저 더는 못 견뎌요.”
위로하려던 임성결은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도무지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붉어진 그녀의 눈시울을 보자 심장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한참 뒤, 임성결이 물었다.
“정희야, 이 세상에는 네가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없는 거야?”
순간 멈칫한 그녀가 천천히 대답했다.
“오직 아빠뿐이에요.”
“그럼 아버님을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지.”
서정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선배. 몸이 많이 나아진 것 같으니 이만 가볼게요.”
늘 하고 다니던 결혼반지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본 임성결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디 가? 배웅해 줄게.”
“괜찮아요, 차 불렀어요. 금방 올 거예요.”
그녀가 너무 깔끔하게 거절한 탓에 임성결은 그저 알겠다고만 했다. 하지만 서정희가 한껏 슬픈 얼굴로 또 그런 말까지 하는 것을 들은 임성결은 혹시라도 그녀가 울적함에 바보 같은 짓이라도 할까 마음이 놓이지 않아 헤드라이트를 끄고 몰래 그 뒤를 쫓았다.
차는 강변으로 향했다. 서정희는 홀로 강을 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비록 비가 그치긴 했지만 여전히 기온이 낮아 임성결이 다가가 그녀를 말리려는데 검은색 SUV가 그녀의 곁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경제 잡지에 오랜 기간 머무르고 있는 고귀한 남자가 가로등 아래 나타났다.
임성결은 깜짝 놀랐다. 설마 서정희의 남편이 저 사람인 걸까!
강바람에 서정희의 머리카락이 휘날리자 안 그래도 초췌하던 그녀의 얼굴에 처량함이 물들어 염정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무슨 일이야?”
서정희는 마치 그의 모습을 똑바로 보겠다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서씨 집안 파산, 당신과 연관이 있어?”
“응.”
직설적인 서정희의 물에 염정훈의 대답은 더더욱 단호했다.
“그 애도 네 아들이야?”
서정희는 두 번째 질문을 했다.
그녀는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서정희는 자신이 오해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염정훈은 부인할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했다.
“응.”
서정희는 다가가 그의 뺨을 때렸다.
“염정훈, 이 뻔뻔한 자식!”
염정훈은 손쉽게 그녀의 팔목을 잡으며 한 손으로 그녀의 눈물자국을 매만졌다.
“아파?”
“개자식,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우리 집안이 너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긴 속눈썹 아래의 염정훈의 눈동자는 차갑고 매정했고 목소리는 시린 한기가 묻어 있었다.
“서정희, 답이 궁금하면 가서 네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그래.”
서정희가 울먹이며 물었다.
“염정훈, 너 도대체 날 사랑한 적은 있어?”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매정함뿐이었다. 염정훈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없어. 처음부터 넌 내 장기 말이었어.”
서정희의 눈물이 후드득 그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시린 바람이 불자 남아있던 온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너 날 미워하는구나. 그렇지?”
“그래. 이건 너희 집안이 나한테 진 빚이야. 서정희, 네가 서제평의 딸인 걸 어떡해. 난 네가 매일 고통 속에서 살면서 내 동생에게 잘못을 빌길 바라!”
“네 동생은 진작에 실종됐잖아? 우리 집안과 무슨 상관인 건데?”
경멸 어린 눈빛으로 서정희를 쳐다보는 염정훈은 마치 구천 위의 신의 심판자 같았다.
“서정희, 네가 온전하게 모든 사람의 사랑을 누리고 있었을 때, 내 동생은 개자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었어. 천천히 생각해 봐, 난 너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을 거야. 난 네가 평생 두려움에 휩싸여 겨우겨우 살아가면서 내 동생이 겪었던 모든 아픔을 다시 겪길 바라!”
차갑게 말한 염정훈은 다리를 들어 차에 타며 한 마리를 남겼다.
“내일 아침 9시, 법원에서 기다리지.”
서정희는 황급히 쫓아 와 쉴 새 없이 문을 두드렸다.
“똑바로 얘기해, 동생이 대체 어떻게 된 건데?”
차는 그대로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빠르게 멀어졌고, 중심을 잃은 서정희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