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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수요일 저녁 7시 정각 소희는 전위 호텔 앞에 나타났다.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리자 소희는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아빠 소정인이었다. [소희야, 아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차가 좀 막히네. 먼저 들어가있어.] 소희는 발걸음을 늦추며 이따 임구택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 3년 동안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임구택이 이 결혼을 동의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부한다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그렇다고 임구택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과거 소씨 가문의 회사가 위기를 맞자 뻔뻔하게 임씨 가문을 찾아가 혼인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였고, 당시 임씨 가문의 장남은 이미 결혼을 한 터라 자연스레 그 약속은 차남 임구택이 이행하게 되었다. 그가 내키지 않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임씨 가문은 당연히 소씨 가문에 좌지우지 당하지만은 않았다. 예물로 50억 원을 건네어 소씨 가문이 난관을 이겨내게 도우면서도 조건을 제시했다. 3년 뒤에 이 혼사가 자동 해지되는 것으로. 3년 전, 그녀는 아직 법정 결혼 연령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대리인이 가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결혼하자마자 임구택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결혼 해지를 석 달 앞두고 돌아왔다. 결혼을 거부한다는 태도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하필이면 오늘,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 때문에 그녀를 앞세워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소희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생각하였다. “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 아내에요!” 그가 그녀를 거들떠보기나 할까? 듣건대 임구택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성의 유명한 악질이었다고 한다. 강성의 흑과 백을 모두 통솔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매섭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며칠 전 TV의 경제 채널에서 임구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명품 양복을 입고, 거만하면서도 우아하고 듬직해 보였다. 그녀는 임구택이 오늘도 TV에서처럼 기개가 있고 교양있게 행동하여 자신을 너무 난처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천위 호텔은 전체가 전통 양식으로 꾸며져 있는데 고풍스럽고 품위있는 것이 마치 고대 왕실의 휴가 별장지 같았다. 소희는 소정인이 알려준 방 번호대로 연풍관 3층으로 갔다. 3층은 모두 스위트룸이고, 마루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조명이 은은하고 유난히 조용했다. 스위트룸 앞에 도착한 소희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닿자 문이 저절로 빼꼼 열렸다. 이에 소희는 살짝 당황했다. 설마 임구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소희는 예의상 몇 번 더 두드렸다. 응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희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세우고 문을 밀고 안으로 두 걸음 걸어갔다. 현관에만 어두운 조명이 켜져 있고 안은 어두워서 보이질 않았다. 아무도 없나? 스위트룸은 넓고 가운데는 거실, 양옆은 휴식공간과 침실이었다. 그녀는 거실로 갔다가 느낌이 좋지 않아 막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침실 쪽에서 물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듯 내리깐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소희의 머릿속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3초 동안 서서 고민하다가 그녀는 결국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임 선생님이십니까? 왜 그러세요?” 소희는 침실 문을 밀어 열면서 나직이 물었다. 갑자기 한쪽 팔이 그녀를 욕실로 불쑥 끌고 들어갔다. 남자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을 조르면서 고통을 간신히 참으면서도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내게 약을 먹여? 죽고 싶어?” 거실에서는 그나마 창밖의 불빛이 비쳐 들지만 욕실 안은 캄캄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소희는 꾹 참고 반항하지 않았다. 목이 조여와 쉰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저 아니에요!” “그럼 너는 누구야?” 남자는 찬물을 한참 맞았는지 온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내뿜는 호흡은 뜨거웠다. 차가웠다 뜨거웠다를 반복하면서 소희는 멍때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소리 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남자의 숨결은 점점 거칠어져 갔고 이미 참을 만큼 참아 한계에 도달한 듯 했다.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이 갑자기 스르르 뒷쪽으로 미끄러져 목덜미를 감싸안더니 급기야 고개를 숙여 거칠게 키스를 했다. 그의 입술은 차갑고 난폭했다. 소희는 순간 눈을 부릅뜨고 다리를 들어 남자를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힘과 속도는 모두 그녀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는 긴 다리로 그녀의 무릎을 누르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줘, 네가 뭘 원하든, 사후에 다 보상해 줄게.” 소희는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설마 다른 사람이 임구택에게 약을 먹인건가? 어둠 속에서 남자의 숨결이 그녀의 모든 감각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도울지, 그더러 다른 여자를 찾으라고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남자의 키스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소희는 두 사람이 어떻게 욕실에서 침실로 들어갔는지도 잊은 채 저항과 순종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남자는 이미 그녀를 안고 거침없이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두 사람이 결혼하면 이런 일도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한건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는 하늘위로 붕 날아올랐다 바닥으로 떨어졌다를 반복한 이 시간이 지난 3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 막 끝냈는데 마침 누군가가 들어와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임 대표님?” “들어오지 마!” 남자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만족스러운 나른함을 띠고 있었다. 바깥의 소리가 사라졌다. 잠시 후 임구택은 일어나서 가운을 입고 침대 위의 여자를 보지도 않은 채 방을 나갔다. 소희가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밖에 불이 켜지고 문틈으로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임구택은 거실로 나와 소파에 기대었다. 조각상같은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고, 눈빛에 만족 후의 나태함만이 남아있었다. 비서가 다가와서 물었다. “임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비서는 임구택이 술자리에서 갑자기 일어서더니 따라오지도 못하게 하고 두 시간이 넘어도 나오지 않자 불안해서 올라와 본 것이었다. 그는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의 숨소리인 듯했다. 임구택은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 “괜찮아!” 비서는 방금전 상황에 대한 상상을 그만두고 말하였다. “소정인 씨가 1009번 방을 예약하고 9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다 됐습니다.” 임구택이 되물었다. “소정인이 누구지?”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생각난 듯 덤덤하게 물었다. “아직 3년 안됐지?” 비서가 답하였다. “몇 개월 남았습니다.” 임구택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얼마나 차이 난다고.” 비서가 말했다. “소정인 씨가 이미 몇 차례 전화를 걸어 만나뵙고 싶으시답니다. 아마 대표님께 부탁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임구택은 방 안의 여자가 생각난 듯 말을 아끼는 듯한 어조를 보였다. “이미 한번 팔았으면서 또 팔려고 해? 뻔뻔한 인간. 내가 계속 받아줄 것 같아? 아님 도대체 얼마나 값진 딸이길래 다시 팔 생각을 하는거야? 안 만나!” 마지막 세 글자는 무정하고 차가웠다. 소희는 침실에서 밖의 대화를 똑똑히 듣고 있었다. 방금전까지 홍조를 띤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버렸다. 만약 임구택이 침실에 누워있는 여자가 소정인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판다’고 말했으면 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온몸이 쑤시는 것을 참고 침대에서 내려와 자신의 옷을 찾아 입고 닥치는 대로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곧장 베란다로 가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소녀는 땅에 떨어지고 몇 바퀴 굴렀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몇 미터밖의 청석로에 나타났다. 가녀린 그녀의 모습은 곧 어둑어둑한 불빛 속으로 사라졌다. 임구택은 비서와 거실에서 한참 다른 이야기도 나누다가 나중에 비서에게 분부했다. “오늘 술자리에서 누가 손버릇이 나쁜지 알아봐.” 비서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방금 들은 소리가 떠올라 재빨리 알아차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네!” 임구택은 일어나 침실로 돌아가 어둠 속에서 킹사이즈의 침대를 힐끗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 돈 가지고 여기서 나가. 앞으로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말고!”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임구택은 눈썹을 찡그리며 불을 켰다. 은은한 불빛 아래에 어수선한 침대만 보일 뿐 아까의 그 여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돌아서서 욕실에 가보았지만 욕실 안도 텅 비어 있었다. 그의 가늘고 긴 눈동자에 의아함이 내비쳤다. 설마 방금 그가 침대에서 품었던 여자가 귀신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분명히 침대 시트에 묻은 빨간 자국을 보았다.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침대 맞은편 캐비닛을 본 임구택은 천천히 다가가 꽃병 밑에 있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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