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갑자기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심자영은 손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뒤돌아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새까만 주경민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거두었다.
"오빠, 돌아왔어..."
주경민은 그녀한테 시선을 주지 않았고 방안에 자욱한 연기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방에서 뭘 태우고 있는 거야?"
심자영이 말하려고 하는데 강유리가 다가오더니 다정하게 주경민의 팔짱을 끼고 득의양양해하며 심자영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심자영은 갑자기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서 있기만 해도 누군가의 세상을 모두 빼앗아갈 수 있다는 말을 말이다.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심자영은 자신의 묵직한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쓸모없는 그림 원고들이야."
그녀는 거짓말했다.
주경민은 그 말을 믿었고 더는 따지지 않았고 강유리를 데리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
심자영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오빠, 나 할 말 있어."
그녀는 주경민과 제대로 인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경민은 미간을 찌푸렸고, 주경민이 말하기 전에 강유리가 먼저 질타하며 말했다.
"자영아, 민이는 정말 널 여동생으로 생각해, 너 설마 아직도 포기 못하고 집착하려는 거야?"
"아니..."
"됐어, 앞으로 중요한 일 아니면 나 귀찮게 하지 마."
주경민이 그녀의 말을 끊었고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심자영은 코끝이 찡해 났고 눈도 아파 났다.
주경민은 전에 그녀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안정감이 없는 줄 알고 그녀를 계속 달랬고 그녀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주경민은 전에 그녀의 모든 일이 다 제일 중요하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든 관심은 강유리한테 있었다.
전에는 그녀가 눈물 한 방울만 흘려도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남자가, 지금은 그녀가 우는 걸 보아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심자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비참하게 뒤돌아 도망치듯 문을 닫았다.
...
그날 밤, 심자영은 편히 잠에 들지 못했고 밤새 꿈을 꾸었다.
꿈에는 모두 그녀와 주경민의 지난날들이었다.
그녀의 부모가 돌아가고 나서, 이모 추영자가 회사를 대신 맡았고 자주 밤늦게까지 일했었다.
주경민은 심자영을 돌보았고, 손에 물도 안 묻히던 그가 심자영을 위해 요리도 하고 빨래도 했었다.
심자영이 생리를 해서 배가 아플 때면 흑설탕 생강차도 끓여주었다.
심자영이 번개소리를 무서워해서 그는 그녀의 곁을 지켰고 잠이 들 때까지 그녀를 달랬다.
반 친구들이 심자영이 고아라고 놀렸을 때, 그는 처음 싸웠고 모든 사람들한테 그녀가 주씨 가문의 유일한 공주님이라고 했었다.
기억 속 부드러운 얼굴에 그녀는 계속 빠졌었다.
하지만 갑자기 부드러움이 사라졌고 역겨움과 놀라움이 가득해서 말했다.
"심자영, 너 정말 역겨워."
심자영은 꿈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에는 눈물 자국이 있었고 베개까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녀는 눈이 새빨갛게 부었기에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해서야 초췌한 얼굴을 겨우 가렸다.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일 보러 가려던 심자영이 주방에서 바삐 도는 강유리를 보게 되었다.
"자영아 깼어."
강유리는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들고 웃으며 그녀한테 손을 흔들었다.
"네가 좋아하는 용안죽 끓였어, 얼른 먹어 봐."
심자영은 그녀가 아무렇지 않아 하는 모습을 보자, 그녀와 접촉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나..."
"자영아, 내가 생일 파티에서 네 물건을 건드렸다고 그러는 거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새언니한테 화내지 마."
강유리는 눈시울을 붉히고는 억울해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새언니라는 말을 심자영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녀는 감정을 누르며 강유리를 돌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강유리가 갑자기 한 발 다가왔고 두 사람이 서로 부딪쳤다. 순간 뜨거운 죽이 강유리한테 씌워졌고 바닥에 떨어져 깨버렸다.
"심자영, 너 뭐 하는 거야?"
분노에 찬 주경민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다가와 심자영을 밀어내고는 마음 아파하면서 덴 강유리의 손을 들어 보았다.
"심자영, 불만 있으면 나한테 화풀이해, 유리한테 이러지 마. 지금 당장 네 새언니한테 사과해!"
주경민이 묻지도 않고 그녀가 잘못했다고 확신하는 말에 심자영은 멍하니 굳어버렸다.
손등이 데어서 아려났지만 마음이 아픈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에 그녀가 다칠 때면, 조금만 빨갛게 돼도 주경민이 제일 먼저 발견했고 아주 마음 아파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강유리밖에 없었다.
"민아, 자영이가 아직 나한테 화나서 그런 거야, 일부러 나 다치게 하려는 거 아닐 거야, 화내지 마."
"심자영,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잘못해 놓고 사과도 안 해? 너 지금 왜 이렇게 변한 거야, 너무 실망이야. 당장 네 새언니한테 사과해, 들었어?"
심자영은 머리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주경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누군가 그녀가 고아라는 걸 소문내서 모두가 알게 됐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한 번은 체육 시간에, 반급비가 잃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가 생리 때문에 반으로 돌아갔었기에 그녀가 제일 큰 용의자가 되었다.
다들 그녀를 도둑이라고 욕했고 고아라서 버릇이 나쁘다고 했었다.
그때 주경민이 이미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갔고 회사를 대표해서 수십억짜리 계약을 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자 바로 날아와서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학교한테 제대로 조사해서 그녀의 결백을 증명하라고 강경하게 말했다.
그때 주경민은 무조건 영원히 심자영을 믿는다고 했었다.
고작 몇 년 지났을 뿐인데 주경민은 믿음을 모두 다른 사람한테 주었다.
심자영은 억지스럽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멍하니 주경민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야?"
주경민은 입술을 오므렸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하지 않았다.
심자영은 마음이 점점 식어버렸다.
뒤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렸고 주경민의 아버지 주성호가 계단에서 내려오면서 눈앞의 광경을 보며 불만에 차서 말했다.
"위에서부터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무슨 일이야?"
강유리는 바로 모두 말해주었고 심자영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영아, 내가 네 오빠 여자 친구인 걸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아, 하지만 네 오빠가 언젠가는 결혼해야 하잖아, 계속 이렇게 어리광 부리면 안 되지 않아?"
주성호는 엄격한 눈빛으로 심자영을 바라보았다.
"자영아, 네가 너무했어, 얼른 유리한테 사과해."
"정말 저 아니에요."
아무도 심자영의 무기력한 설명을 들어주지 않았다. 모두 질타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심판했다.
그때, 추영자가 강유리의 어머니 장미숙과 함께 계단에서 걸어 내려왔다.
자기 딸이 다친 걸 보자, 장미숙은 얼른 앞에 있는 추영자를 밀어내고는 달려가 강유리의 손을 잡고 마음 아파했다.
"유리가 다음 달에 피아노 대회에 참가해야 해, 그 대회가 아주 중요해, 손을 다치면 안 돼. 심자영, 너 정말 너무하네!"
"아니에요..."
그 순간, 심자영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
추영자는 안쓰럽게 심자영을 바라보며 그녀를 뒤로 보호했는데 주성호가 불만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매일 그딴 사업 때문에 바삐 돌아서 이런 거잖아, 네 조카 봐봐, 저게 뭐야. 질투에 눈이 멀어서 사람을 때려놓고 인정도 안 하잖아! 사과 안 할 거면, 당신이 대신해서 미숙이랑 유리한테 사과해!"
"이모부! 이모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심자영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동안 이모가 장미숙 때문에 많이 억울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장미숙은 주성호가 젊었을 때의 첫사랑이었다. 몇 년 전 그녀가 이혼하고 나서 주성호가 그 모녀를 데리고 와서는 당당하게 주씨 저택에 들어오게 했다.
주성호의 편애 때문에 장미숙은 추영자보다 더 사모님 같았다.
그녀도 계속 이 모녀와 엮이는 걸 기피했는데, 강유리가 주경민과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심자영은 이모가 자기 때문에 억울함을 당하는 걸 볼 수가 없어, 억울함과 불만을 참고 고개를 숙였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새언니."
그녀는 아주 힘겹게 말했다.
마음이 억울함으로 가득 덮였고 채워져서 결국 실망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