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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그날 저녁, 강은영의 도움을 받아 식사를 마친 박강우는 일하러 진기웅과 함께 서재로 갔다. 들어가기 전, 강은영은 절대 아홉 시를 넘기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서재 문이 닫히자마자 강은영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여보세요.” “당장 집으로 들어와!” 수화기 너머로 진미선 여사의 분노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강은영은 전화를 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외출 채비를 하려는 그녀에게 전 집사가 다가와서 공손히 물었다. “사모님, 지금 나가시게요?” “네.” 강은영은 고개를 끄덕인 뒤,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30분 후에 서재로 꿀물 한잔 타서 올려줘요.” 말을 마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했다. 지난 생에 그렇게 싸워댔는데도 그의 사소한 습관들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만 바라봤을 박강우는 점점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 사모님.” 전 집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사모님을 보면서도 낮에 강설아에게 주먹질을 하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강은영은 차를 운전해 친정으로 갔다. 문을 열어준 장씨 아주머니는 그녀 앞에서 비웃는 표정을 대놓고 숨기지 않았다. 현관까지 걸어가자 거실에서 울고 있는 강설아의 목소리와 그녀를 위로하는 진미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그만 울어. 엄마가 이따가 걔 호되게 혼내줄게.” “엄마, 그러지 마. 은영이가 뭔가 나한테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있나 봐. 얘기로 풀면 돼. 절대 애 욕하지 마.” 강은영은 그렇게 처맞고도 아직도 착한 척 연기하는 강설아에게 내심 탄복했다. 진미선은 그녀가 그럴수록 화만 치밀었다. “바보. 걔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직도 걔 편을 들어?” 강은영은 뻣뻣하게 경직된 채로 안에서 하는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지난 생에 강설아가 저런 말을 할 때마다 언니는 나를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이미지를 챙기고 강은영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혐오를 자극하기 위한 연극이었을 줄은 그때는 몰랐다. 모든 사람들이 강은영은 나쁜 동생이고 강설아는 그런 동생을 살뜰히 보살피는 착한 언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상 강설아는 아버지가 불륜으로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고 진미선의 진짜 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진미선의 마음을 이 정도로 꽉 잡고 있으니 여러모로 대단한 여자였다. 장씨 아주머니는 강은영이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자 그녀가 찔리는 게 있어 못 들어가는 줄로 알고 날이 선 말투로 비아냥거리듯 재촉했다. “아가씨, 오셨으면 들어가시지 않고 여기서 왜 길을 막고 있어요?” 강은영은 고개를 돌리고 아주머니를 힘껏 노려보았다. 그걸 본 아주머니가 어깨를 움찔했다. 안에서 강설아를 달래던 진미선은 소리를 듣고 현관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강은영의 얼굴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당장 기어들어와!” 시선이 마주치자 강은영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미선은 딸의 불량한 태도에 화가 치밀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강은영은 가볍게 고개를 돌려 공격을 피했고 진미선은 중심을 잃은 탓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던 진미선은 앙칼진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너 엄마한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장씨 아주머니는 다급히 다가가서 진미선을 부축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진미선은 다시 강은영에게 달려들었지만 강은영은 가볍게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고 분풀이 대상을 찾지 못한 진미선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강은영 너!” 진미선은 분노한 눈빛으로 강은영을 삿대질했다. 강은영은 비웃음 가득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웃겨?” 진미선은 당장이라도 저 요망한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강은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소문에 그렇게 너그럽다던 진 여사도 어쩔 수가 없네. 남편이 바깥에서 낳아온 사생아는 그렇게 감싸고 돌면서 친딸한테는 이토록 매정하다니.” 3일 출장 갔다가 돌아온 강준형은 현관에 들어서다가 강은영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 진미선의 얼굴은 이미 분노로 거무죽죽하게 변한 상태였다. 강설아는 사생아라는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진미선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하지만 진미선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제야 안심하고 원망 섞인 목소리로 강은영에게 말했다. “은영아, 오해가 있으면 대화로 풀어야지.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면 못써.” 진미선은 그 말을 듣자 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 “설아야, 쟤랑 얘기할 필요도 없어.” “엄마….” 그러자 강설아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강준형은 아수라장이 된 거실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화로 강은영이 강설아를 때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사실 믿지 않았는데 지금 강은영의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니 사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강설아는 강준형을 보자마자 눈물을 머금고 다가갔다. “아빠….” 울먹이는 목소리에 강준형은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는 음침한 눈빛으로 강은영을 쏘아보며 말했다. “넌 점점 예의가 없어지는구나. 언니한테 왜 그랬어?” “당장 네 언니한테 사과해!” 진미선도 앙칼진 목소리로 거들었다. 강은영은 참 단란해 보이는 세 가족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내가 사생아인 줄 알겠네!’ 그녀는 시큰둥한 얼굴로 강준형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내가 싫다면?” 진미선은 불량한 태도에 더욱 더 화가 치밀었다. “너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니? 내가 어쩌다가 너 같은 망나니를 낳았는지!” 강은영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강설아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억지로 감추며 진미선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엄마, 화 풀어. 은영이한테 그러지 마.” “설아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진미선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강설아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강은영을 바라봤다. 사실 강은영을 임신했을 때 병원에서 검진받은 바로는 쌍둥이 남매라고 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남자아이는 사산하게 되었고 강은영만 살아서 태어났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강은영의 탓으로 돌렸고 그래서 친딸이지만 정이 가지 않았다. 진미선은 옆에 있던 책을 들어 강은영에게 집어던졌고 강설아는 옆에 서 있다가 중심을 잃고 소파에 쓰러졌다. 탁! 너무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강은영은 피하지 못하고 책 모서리에 이마를 그대로 맞았다. 순식간에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진미선은 소파에 넘어진 강설아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넘어지다가 소파 손잡이에 부딪혀 이마가 살짝 부은 강설아를 보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설아야! 미안해! 엄마가 일부러 너 밀친 거 아니야.” 강준형도 강설아에게로 다가갔다. 강은영은 가만히 서서 얼굴을 타고 내리는 핏물을 느끼며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설아는 여전히 진미선의 손을 잡고 착한 척 좋은 말만 하고 있었다. “엄마, 은영이한테 그러지 마. 은영이가 일부러 나한테 그런 건 아닐 거야.” 하지만 그건 불난 집에 기름 붓기였다. 강준형은 분노한 눈빛으로 강은영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당장 네 언니한테 사과 안 해?” 아무도 강은영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럴 줄 알면서 대체 뭘 기대하고 온 걸까?’ 강은영은 속으로 잠시라도 기대했던 자신을 비웃었다. 이 집은 강설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녀가 설 자리는 없었다. 부모님의 사랑은 항상 강설아의 몫이었다. “은영아, 아빠 말 들어. 아빠 화내면 무서운 거 알잖아. 은영이 착하지?” 강설아는 놀란 얼굴을 하고 강준형의 손을 붙잡았다. 강은영은 저 가식적인 얼굴에 속아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준 사람을 밀어냈던 과거의 자신이 너무 한탄스러웠다.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사과 받을 자격은 있어?” “너!” 강준형은 얼굴이 푸르뎅뎅해서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장씨 아주머니에게 소리쳤다. “채찍 가져와!” “아빠, 안 돼!” 강설아가 비명을 질렀다. “은영아, 어서 아빠한테 잘못했다고 해.” “설아 넌 가만히 있어. 내 오늘 쟤 못난 버릇을 톡톡히 고쳐 놓고 말 거야!” 진미선은 오히려 그런 강은영을 말렸다. 강은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채찍을 가지러 간 장씨 아주머니가 늦어지자 강준형은 그대로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서 잡았다. 짝! 굵은 가죽 허리띠가 지면을 치는 소리가 아찔하게 들려왔다. “사과 할 거야, 말 거야?” 강준형이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강은영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강 회장님, 뭔가 잊으셨나 본데 난 당신 딸이기도 하지만 부현그룹 박강우 대표의 아내이기도 하거든?” 아버지가 아닌 강 회장이라는 호칭이 그녀와 이들 가족들의 관계를 깔끔히 선을 그었다. 지난 생에는 너무 가족의 사랑을 갈망해서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박강우까지 죽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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