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차에 오른 강은영은 박강우가 움직이지 못하게 매의 눈으로 감시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상처가 벌어질 위험이 있기에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꿀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에 앞에서 운전하고 있던 진기웅은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이번에는 미인계인가? 대표님이 저런 허접한 연기에 넘어가지 않으셔야 할 텐데….’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백미러를 살폈다.
박강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 보는 사람도 없고 연기는 그만해도 돼.”
강은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회귀해서 정신을 차린 뒤에 눈에 띄게 반성을 했는데도 감동은커녕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그가 야속했다.
그녀는 그의 팔에 고개를 기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잉꼬부부 연기도 현실감 있게 하려면 연습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어?”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그녀가 칼 들고 협박했을 때 박강우는 드디어 그녀를 놓아주기로 약속했다.
단 조건이 붙었는데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마지막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여주면 자유를 돌려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곧 할머니 팔순잔치잖아.”
그가 말이 없자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
차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지금 할머니 팔순잔치로 자유를 달라 협박하는 건가?
남자의 손이 그녀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고개를 치켜들었다. 음울한 눈빛과 마주한 강은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뭐 때문에 또 화난 거지? 아, 답답해.’
“강은영, 할머니 팔순잔치 때 소란 부리면 강영물산이고 뭐고 다 뒤집어버릴 거야.”
진한 살기가 담긴 말에 강은영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왜 잊었을까.
박강우는 가족을 제외한 모두에게 악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전생의 그녀도 많은 사고를 치고 소란을 부렸지만 그의 할머니는 건드릴 수 없는 역린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래도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란 피운다는 게 아니야. 일단 이거 놓고 얘기해. 아파.”
그녀는 작은 손으로 남자의 손을 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따뜻한 손길이 닿자 박강우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풀었다.
무슨 짓을 해도 역시 그녀에게는 매정하게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연기인 걸 알면서도 그녀의 눈물을 보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
병원에 도착하자 강은영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 치료실로 들어갔다. 의사가 상처를 꿰맬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울긴 왜 울어?”
박강우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분명 집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누구 하나 잡아먹을 기세였는데 확연히 상반된 모습에 또 무슨 꿍꿍이일까 하는 의심만 깊어졌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그에게 물었다.
“많이 아프지?”
평소에 라면 끓이다 조금만 뜨거워도 아파서 난리를 피웠는데 칼에 찔린 상처는 얼마나 아플까.
박강우는 굳은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안 아프다고 하면, 다음에는 더 세게 찌르려고?”
간호사와 의료진들이 묘한 눈빛으로 강은영을 바라봤다.
강은영은 순간 눈을 부릅뜨고 박강우를 째려봤다.
상처 치료가 끝난 뒤, 그녀는 의사에게 다가가 주의사항을 자세히 기록했다. 남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비서를 호출했다.
“진 비서.”
“네, 대표님.”
“요즘 강은영 뭐 하는지 자세히 감시하고 보고해!”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다닐지 궁금했다.
‘강은영, 네가 아무리 애써도 넌 절대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분명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과 표정인데 지켜보고 있는 진기웅은 등골이 오싹했다.
되돌아온 강은영은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여보, 선생님이 입원 안 하고 바로 집에 가도 된대.”
처음에는 상처가 걱정돼서 입원시키려고 했는데 의사는 상처가 깊지 않다며 감염만 주의하면 된다고 했다.
박강우는 그녀의 손에 들린 약봉지를 받아 진기웅에게 넘기고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강은영은 자신의 손을 감싼 남자의 커다란 손을 바라보며 꿀을 먹은 것처럼 기분이 달콤해졌다.
그들은 그 길로 차를 타고 해운동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했는데도 박강우가 차에서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자 강은영은 그의 손을 꽉 잡고 잡아당겼다.
박강우가 눈썹을 꿈틀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또?”
“입원 안 하는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회사 가서 야근하는 건 안 돼.”
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에서 그녀만의 단호한 의지가 묻어났다.
박강우는 음침한 눈빛으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일할 때 방해받기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더운 날씨에 야근하다가 감염이라도 되면 어쩔까, 그녀는 그게 더 걱정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기웅은 저도 모르게 오싹해서 불퉁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 이따가 중요한 회의가 여섯 개나 잡혀 있어요. 지금 가시지 않으면 늦는다고요.”
말투는 공손하지만 강은영을 향한 원망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대표님이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강은영의 눈시울이 확 붉어지는 것을 본 박강우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화상 회의 준비하라고 해.”
진강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강은영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해맑게 웃으며 박강우를 부축해 차에서 내렸다.
병원을 다녀온 사이, 이미 저택에는 새로운 고용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전부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강은영은 서재로 향하는 박강우의 뒤를 졸졸 쫓아가며 종알거렸다.
“점심에 뭐 먹을래? 내가 만들어 줄게.”
마치 원래부터 이런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럽고 온화한 말투였다.
박강우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째려보자 강은영은 어색한 표정으로 코를 어루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진강우가 서류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일하고 있어. 방해하지 않을게.”
말을 마친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새로 온 집사가 그녀를 보자마자 공손히 인사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강은영은 기분이 좋아져서 담담히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다들 할 일 하세요.”
“네.”
고용인들은 서둘러 하던 일을 계속했다.
집사는 공손히 계단 입구에 서서 안주인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집사님.”
“네, 사모님. 앞으로 전 집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네, 전 집사님.”
“지시를 내려주시죠.”
“앞으로 강설아라는 여자가 오면 절대 집으로 들여보내지 마세요. 아셨죠?”
“네.”
싸늘한 기운이 담긴 말투에 전 집사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핸드폰이 진동했고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핸드폰 화면을 한참 노려보다가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은영아, 나 두 시간 후면 공항 도착해.”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은영은 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박성철.
머릿속에 그의 잔인한 미소가 떠오르자 순간 숨이 막혀왔다.
“마중 나와줄 수 있어?”
이상함을 전혀 눈치 못 챈 박성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나가 죽어, 이 쓰레기야!”
강은영은 버럭 고함을 지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일하고 있던 고용인들과 전 집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부현그룹 대표 사모님이 성격 포악하다던 소문이 진짜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