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온 이사님, 부탁하신 증거들은 전부 이 안에 담아두었습니다.”
온하준에게 USB를 건넨 사람은 의뢰하면 무엇이든 알아봐 주는 사설탐정이었다. 탐정에게서 증거를 건네받은 온하준이 손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영상 속 조아영은 얼굴이 반반한 남자를 끌어안고 웃으며 호텔로 들어갔다.
남자는 장문호였고 조아영의 외도 상대였다. 둘이서 호텔로 들어가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탐정이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조아영은 굶주린 사람처럼 장문호와 자주 호텔을 들락거렸고 한번 들어가면 몇 시간 후에야 나왔다. 심지어 가끔 그의 차에서 몰래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깊은 밤 어두운 주차장에서 차를 세워놓고 하기도 했다. 미처 닫지 못한 창문 틈 사이로 그들의 음탕한 소리가 적나라하게 흘러나왔다. 온하준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때의 상황이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역겨웠던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백화점에서 오랫동안 일했었던 그는 이성이 지금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로지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만 충실할 거라고 하던 조아영은 결국 먼저 그를 배신하며 음탕한 생활에 푹 빠져 있었다.
‘이젠 나한테는 질렸다는 거야? 정말 그래?'
서랍에서 서류 뭉치를 꺼낸 온하준은 그대로 대표실로 갔다. 안에서는 짙은 술 냄새가 풍겨 저도 모르게 기침을 하고 말았다. 조아영이 또 회사에서 술을 마신 것이다. 온하준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소파에 퍼질러 앉아 있었고 여전히 술에서 깨지 못한 모습이었다. 온하준은 서류 뭉치를 그녀의 옆으로 내려놓았다.
“아영아, 이건 새로운 기획안들이야. 네 결재가 필요해.”
조아영은 그제야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온하준의 모습에 예쁘면서도 피곤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 어젯밤도 장문호와 무리할 정도로 즐긴 것이 분명했다.
“이런 일은 그냥 비서한테 맡겨. 왜 네가 직접 가져와?”
그녀는 말하면서 펜을 들어 대충 사인했다. 온하준은 계속 다음 서류를 넘겨주었다.
“뒤에도 사인만 하면 돼.”
조아영은 그의 말대로 사인했다. 온하준이 서류를 다시 정리하자 조아영은 갑자기 그의 팔을 잡으며 애교를 부렸다.
“자기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짙은 장미 향의 향수 냄새가 확 풍겨왔다. 온하준은 그녀의 목에 남은 빨간 마크를 빤히 보다가 재무이사가 지난주에 올렸던 보고서를 떠올렸다. 재원 그룹은 장성 그룹 쪽에 무려 3% 이익이나 양보해주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리며 그는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숙여 확인하니 장모님의 문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60억. 그 이상은 안 되네. 대신 아영이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들은 전부 없애야 할 거네. 그리고 자네와 아영이가 결혼했다는 사실도 지금처럼 계속 숨기게.]
[자네와 아영이가 처음부터 결혼한 적 없는 것처럼 굴라는 말일세.]
그는 조아영의 손을 떼어내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취했어. 내가 가서 꿀물이라도 타오라고 할 테니까 얌전히 있어.”
휴식실을 지나칠 때 벌어진 문틈 사이로 그는 태이리 장인이 직접 만든 파란 정장을 발견했었다. 그 정장은 보름 전 그의 옷장에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옷이었기에 그의 심장은 더 차갑게 식어버렸다.
빠르게 그녀의 사무실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서류 사이에 끼워둔 이혼 서류를 꺼냈다. 조아영의 사인이 있는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장모님이라고 저장된 연락처로 전송했다.
창밖에서는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꿀물을 마신 조아영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비서들은 옆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중요한 회의가 있었던지라 그녀를 깨워야 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 결국 온하준을 찾아오고 말았다.
깊이 잠든 조아영을 보고도 온하준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옛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라 이 모든 상황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처참하게 느껴졌다. 조아영은 갑자기 몸을 뒤척이더니 불퉁한 모습으로 잠꼬대를 했다.
남자 비서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안색이 확 변하면서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온하준은 담담하게 담요를 들어 조아영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회사에서 나온 그는 곧바로 한세 그룹 대표와의 식사 일정을 소화하러 떠났다.
“온 이사님께서 요즘에 성동구의 부지를 알아보고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지요?”
한세 그룹의 대표는 위스키 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하지만 재원 그룹에서 올해 영화 투자에만 집중적으로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한 룸에서 갑자기 옆방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옆방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말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너희들도 그거 알아? 요즘 아영이가 우리와 놀면서 온하준을 데리고 오지도 않잖아. 몰랐어?”
온하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전부 조아영의 친구였으니 말이다. 조아영의 친구들 중 정상적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온하준은 늘 조아영에게 그런 친구와 거리를 두라고 했지만 조아영은 그의 앞에서는 그러겠다고 말한 뒤 매일 그들을 불러 술 마시러 다니곤 했다.
“그걸 어떻게 모르냐. 솔직히 온하준보다 우리 문호가 더 잘생겼지. 나이도 젊고 집안도 비슷하고 말이야. 그러니 조아영도 계속 장문호를 부르는 거잖아. 온하준을 데리고 다니면 창피하니까.”
“맞아. 온하준이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7년이면 이젠 질릴 때도 됐지.”
“내가 듣기로는 온하준이 그동안 조아영의 회사를 위해 엄청 열심히 일했다던데? 그런데 아쉽게 됐지. 애초에 조아영은 진심으로 온하준을 사랑한 적 없었잖아. 뭐 그래도 그 얼굴은 내 취향이기도 한데. 만약 조아영이 질렸다고 버리면 내가 꼬셔서 놀아볼까 하는데 어때?”
“하하하. 야, 너는 남이 먹다 버린 것도 주워서 먹으려고?”
또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잔을 들고 있던 온하준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바로 옆방으로 찾아가 발로 문을 차버렸다. 그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 저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장문호는 가죽 소파에 앉아 태연하게 와인잔을 흔들며 잔뜩 무시하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아, 온 이사님. 마침 잘 오셨네요.”
장문호는 핸드폰을 높이 들었다. 그의 잠금화면은 자선 파티에 참석한 조아영의 모습이었고 일부러 온하준에게 보여주며 도발했다.
“저희가 마침 재원 그룹에서 투자하고 있는 영화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거든요. 온 이사님은 「상류의 노리개」라는 작품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온하준은 바닥에 있던 얼음통을 들어 대리석 테이블 위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얼음이 튀어나오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스무 살이었던 그때 구청에서 나오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는 조아영의 손을 잡아 주머니에 넣으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었다.
“온 이사. 왜 화를 내고 그래.”
조아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며 쟈넬 5번 향수 냄새가 룸을 가득 채웠다. 조아영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난장판이 된 바닥을 걸었다. 그리고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술에 젖어버린 장문호의 넥타이를 잡았다.
“문호, 너도 그래. 꼭 형부한테 그런 농담을 해야겠어?”
온하준은 결혼반지를 낀 그녀의 손을 빤히 보았다. 그녀는 너무도 능숙하게 외도 상대인 장문호의 넥타이를 정리해 주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조아영은 이내 서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보았다. 그녀의 기세에 룸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가 화가 났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죄송해요. 저희가 눈치 없이 그런 농담을 했네요.”
“하준 씨, 아영이랑 문호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맹세할 수 있어요.”
“맞아요. 하준 씨.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
조아영은 온하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차로 돌아온 후에도 온하준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자신이 탄 차가 영상에서 보았던 그 차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래서인지 조수석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풍겨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한참 침묵이 흐르고 조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준아, 아까 걔들은 전부 다 내 친구야. 네가 그러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다른 사람도 내가 친구마저 질투하는 남편과 함께 산다면서 창피하게 수군댈 거라고.”
‘질투? 창피하다고?'
온하준은 어처구니가 없어 속으로 비웃고 말았다. 조아영은 결국 본심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허, 그래서?”
온하준은 담담하게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그래서라니. 앞으로도 나와 계속 살고 싶으면 속 좁게 굴지 마. 찌질해 보이니까. 쓸데없는 것에도 질투하지 말고. 너 그러는 거 엄청 짜증 나. 알아?”
온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 문을 열어 내렸다. 조아영이 뒤에서 뭐라고 하든 무시한 채 자신의 차로 간 뒤 그대로 떠나버렸다.
‘그래. 그럼 짜증 나지 않게 곧 사라져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