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배고프면 아무거나

고선호는 나유아를 힐끗 쳐다보다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하찮은 일을 하면서도 남한테 이것저것 따지려고 하니, 고씨 가문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비꼬면서 말했다.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면 서비스하지 말아야지.” 나유아는 이 말에 마음이 아팠다. 이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억지로 사실을 왜곡시키고 있다. 그녀는 차갑게 아랫입술을 씩 올리고 조금 무례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다른 사람으로 바꿔드릴게요, 고객님을 더 많이 소개하실 수 있도록 수정의 연락처를 따내는 데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피팅룸을 빠져나와 비서를 부른 후 특별히 당부했다. “들어가서 내 신분을 말하지 마.” 잠깐 머뭇거리던 그녀는 독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물으면 수정 디자이너가 지금 남편이 죽어서 디자인할 마음이 없다고 해.” ‘수정을 찾는다니, 꿈 깨!’ 비서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들어가다가 마침 배지혜가 고선호에게 불평하는 것을 들었다. “이 태도를 좀 봐, 나는 이 웨딩드레스가 마음에 무척 들어서 수정의 연락처를 달라고 부탁했을 뿐인데 저런 태도야. 지금의 종업원은 자질이 너무 떨어져.” 고선호는 배지혜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골치 아팠다. “뭘 종업원한테 따지고 그래? 다른 사람에게 수정이 널 찾아오도록 부탁해볼게.” 비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삐죽했다. 수정이 앞에 있는데 기어코 기분을 건드리더니 지금은 또 수정을 만나려 한다니... 나유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수정 디자이너님은 남편이 돌아가셔서 손님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 고선호의 오른쪽 눈꺼풀이 갑자기 뛰었다. “그럼 기다리죠.” 과부가 된 지 얼마 안 됐으니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유아는 고선호 때문에 잠이 확 가셔 더는 졸리지 않았다. 그래서 성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7억18만을 벌었으니 빨리 와서 축하파티 하자.” 성효진은 듣자마자 웨딩드레스가 팔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혼했으니 팔아도 좋다고 생각한 그녀는 호기심에 물었다. “어느 미친... 퉤! 고객 어르신께서 이렇게 통이 커?” “고선호.” 나유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배지혜한테 사준대.” 성효진은 목소리가 빗나갈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왜 팔아?” 나유아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고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밑지는 장사는 아니야. 한동안 돈 걱정 없어도 되겠어.” 하지만 정말 3년 동안 남의 혼수를 만드느라 바빴다. 7억18만 원, 칠월 십팔일은 두 사람이 혼인신고서를 제출한 날이다. 고선호는 아마 진작에 잊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유아는 술을 많이 마셨다. 성효진도 그런 나유아를 위로하며 더 많이 마시고 결국 쓰러져 버렸다. 나유아는 택시를 타고 그녀를 집에 데려다준 후 다시 택시를 타고 가게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고선호가 이혼 협의서를 보지도 못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돌아가서 가져와 따로 부쳐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임시로 길을 바꾸어 3년 동안 살았던 그 ‘집'으로 갔다. 택시가 아파트 앞에 멈추자 나유아는 돈을 내고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막 들어서자마자 강한 힘으로 문에 부딪히던 순간 남자의 횡포한 키스가 떨어졌다. 나유아는 머리가 어지럽고, 익숙한 냄새와 뜨거운 체온이 코 사이를 가득 메워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만약 며칠 전에 그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다면, 그녀는 기뻐서 미칠 뻔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후에 배지혜와 함께 그녀의 앞에서 웨딩드레스 보러 온 걸 생각하면 뜨거운 것도 다 식어버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앞에 있는 남자를 세게 밀치고는 입을 닦으며 말했다. “배지혜가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니? 배고프면 가리는 게 없나 봐?” 고선호도 분명 방금 돌아왔을 것이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빳빳한 양복 차림으로 침착하게 눈앞의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글쎄? 이혼한다면서 한밤중에 여기로 뛰어오는 건 아르바이트 고생을 못 견디는 건가?” 나유아는 그의 경멸을 알아채고 옆에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당신에게 아르바이트할 때만큼 돈이 많지는 않지만 고생할 정도는 아니야. ”그녀는 그의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 거실의 불을 켜고, 탁자 위에 놓인 이혼 협의서와 카드를 집어 그에게 던져줬다. “일부러 이걸 가지러 왔는데 마침 잘 왔어. 내일 한 번 더 안 와도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