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드디어 마지막 알바까지 마친 연나은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그녀보다 먼저 도착한 진시준이 거실에 앉아있다가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거기 서!”
“대체 왜 그런 곳에 일하러 나가는데? 내가 용돈 꼬박꼬박 줬잖아!”
연나은은 현관 입구에서 신발을 갈아신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집에만 있으면 너무 심심해서 다양한 인생 체험도 해볼까 해서 나간 거예요.”
진시준은 얼굴에 어린 분노가 조금은 가셨지만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곳에 가지 마.”
연나은도 확실히 더는 갈 필요가 없게 됐다.
그녀는 알겠다며 대답한 후 머리를 푹 숙이고 위층에 올라갔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진시준은 거의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주미나가 매일 그녀에게 수많은 사진을 보내왔다.
반지, 웨딩드레스, 예식장, 부케, 사진들마다 결혼에 대한 행복과 기쁨이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연나은은 그런 그녀에게 일절 답장이 없었다. 짐 정리를 하느라 정신없었으니까.
출국 3일 전 아침, 연나은은 계단 입구에서 이제 막 외출하려는 진시준을 마주치고 재빨리 그를 불러세웠다.
“삼촌, 3일 뒤에 한 시간 만이라도 빼내서 나랑 함께 생일 보내줄 수 있어요?”
그는 수년간 연나은을 키워온 사람이다. 연나은은 떠나기 전에 이런 삼촌과 제대로 작별을 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시준에겐 이 말이 도발로 다가올 뿐이었다.
왜냐하면 앞서 몇 년 동안 연나은은 생일만 되면 그의 팔을 껴안고 윤리에 어긋나게 고백을 퍼부었으니까.
결국 진시준은 고민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런 요구는 두 번 다시 꺼내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해?!”
그가 또 버럭 화내자 연나은이 재빨리 해명에 나섰다.
“이번엔 정말 삼촌 기분 나쁘게 하는 일 없어요. 이전처럼 고백할 일도 없을 거고요. 난 그저...”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고 싶단 말이에요.’
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다 보니 그녀가 말끝을 흐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진시준은 한 글자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앞부분만 듣고 연나은이 드디어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끄덕였다.
생일 당일, 연나은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하루를 기다렸지만 진시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이륙 시간이 거의 되어갈 때 그녀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진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10초 좌우 울려 퍼지고 전화기 너머로 주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시준이 지금 샤워 중이라 전화 받기 불편해.”
그녀의 야릇한 말투에 연나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만 시계를 들여다본 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미나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샤워 마칠 때까지 기다릴게요.”
휴대폰 너머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은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어? 시준이 샤워한다고 지금...”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우리 지금 호텔이야. 너도 이젠 성인이니 샤워 마치면 다음 단계가 뭔지 잘 알겠지? 전 과정을 지켜볼 예정이야? 시준이는 네 삼촌이야. 아무리 좋아해도 이제 곧 결혼할 사람인데 대체 언제까지 그 집안에 들러붙어 있을 거야? 매일 이렇게 시준이한테 집착해야겠어? 파렴치함의 바닥을 보여주는 거야?”
능멸로 가득 찬 그녀의 말이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연나은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눈물을 안 흘리려고 모진 애를 썼다.
후련하게 한풀이를 마친 후 주미나는 아예 전화를 꺼버렸다.
뚝 끊긴 통화 연결음에 연나은도 어두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놨다.
얼마나 지났을까. 박스에서 촛불과 케이크를 꺼냈더니 히터를 틀어서 방안이 후끈해진 바람에 생크림 케이크가 어느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숫자 2, 1로 된 촛불을 삐뚤삐뚤하게 겨우 꽂았다.
이어서 촛불을 달고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연나은의 21번째 생일 소원은 이제 더는 삼촌과 영원히 함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다.
이젠 삼촌이 건강하고 무탈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남은 생에 더는 삼촌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란 소원이었다.
소원을 다 빈 그녀는 촛불을 끄고 정리를 마치고 이 집안에 남은 자신의 마지막 흔적까지 깨끗이 치웠다.
십여 년 동안 지낸 이 집안에 연나은은 오직 세 가지 물건만 남겨뒀다.
200억이 들어있는 은행카드 한 장, 이로써 삼촌이 키워준 은혜를 갚기로 했다.
또 하나는 신혼 선물인데 삼촌이 사랑하는 사람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행복하게 살길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작별인사였다.
[삼촌, 나 이제 포기했어요. 행복하게 잘 살아요 영원히.]
펜을 내려놓고 캐리어를 챙겨서 문밖을 나서며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 집을 한 번 더 둘러봤다.
그러고는 더는 되돌아보지 않고 곧게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