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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보청기가 빨갛게 물들었다... 잠시 멍해 있던 하채원은 황급히 종이로 귀를 닦고 나서 재빨리 침대 시트를 갈아 씻었다. 자신의 병을 알고 난 장옥자가 걱정할까 봐 하채원은 조용히 정리한 다음 핑계를 대며 작별인사를 했다. 떠나기 전 그녀는 자신이 모아둔 적금을 몰래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장옥자는 하채원을 정거장까지 바래다주었지만 여전히 아쉬움을 참지 못하고 손을 흔들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하채원을 떠올리던 장옥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육진 그룹에 전화했다. 비서실에서는 육태준을 찾는 분이 하채원의 유모라는 말에 바로 대표님에게 보고했다. 오늘은 하채원이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이지만 육태준은 그녀와 관련된 전화를 처음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처럼 3일을 버티지 못하고 연락한다고 생각한 육태준은 사무용 의자에 앉아 기분이 유난히 좋았다. 전화기 너머로 장옥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 대표님, 저는 어릴 때부터 채원이를 돌봐온 유모예요. 제발 우리 채원이를 용서해 주세요. 채원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강하지 않아요. 태어나자마자 청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사모님도 채원이를 싫어했고 저에게 맡겼어요.”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서야 집에서 데려갔는데... 하씨 가문에서는 어르신만 빼고 모두 채원이를 가정부 취급했어요... 대표님과 어르신은 단현시에서 채원이를 가장 아끼는 분이니 부디 채원이를...” 전화기 너머로 장옥자의 울먹이는 소리를 들은 육태준은 마음이 우울해졌다. “왜요? 감히 나를 직접 찾지 못하고 당신에게 부탁해 대신 애원해 달라고 했어요? 하채원이 무슨 꼴이 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죠? 쌤통이에요!” 쌀쌀하게 내뱉고 난 육태준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채원으로부터 육태준이 얼마나 좋은지 칭찬만 들었던 장옥자는 그제야 이 남자가 듣던 것처럼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채원이의 좋은 짝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시내로 돌아가는 차에 탄 후 휴대전화가 갑자기 진동해서 열어봤더니 육태준이 보낸문자가 보였다. [이혼하겠다며? 내일 오전 열 시에 봐.] 이 문자를 본 하채원은 잠시 멍해졌다가 답장했다. [네.] 간단하게 한 글자로 대답한 문자가 눈에 거슬려 일할 마음조차 사라진 육태준은 술을 마시려고 사람들을 불러 클럽으로 갔다. 도착해서야 그곳에 마침 배다은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은 취할 때까지 마시자.” 친구 김도영은 육태준의 곁에 앉아 하채원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하채원 오늘은 어떻게 됐어?” 육태준은 눈썹을 찌푸렸다. “앞으로 더는 그 여자 거론하지 마. 내일 이혼하러 갈 거야.” 김도영은 흠칫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태준아, 다시 자유를 얻은 걸 축하한다.” 오늘 육태준은 술을 많이 마셨다. 배다은이 그를 집까지 바래다주려고 했지만 육태준은 거절했다. “필요 없어 불편해.” 내일 이혼한다고 했기에 오늘 저녁에 하채원이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거절당한 배다은은 입을 삐죽하며 말했다. “왜 안돼요? 어차피 이혼하는데 뭐가 불편해서 안 돼요? 혹시 우리 일을 알까 봐 두려워요?” ‘우리 일?’ 육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차에 오른 육태준은 여전히 친절하게 차를 보내 배다은을 집까지 바래다주도록 했다. 가는 길에서 육태준은 휴대전화를 여러 번 켜보았지만 여전히 하채원의 문자를 보지 못했다. ‘없어...’ 집에 도착했으나 어두컴컴한 대산 별장을 보며 육태준은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불을 켜보았지만 여전히 하채원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돌아오지 않았어...’ 집안은 그녀가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술에 취한 육태준은 불편한 몸을 소파에 기댔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지만 이내 악몽을 꾸었다. 꿈에서 피투성이가 된 하채원이 웃으며 말했다. “태준 씨,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육태준이 놀라 깨어났을 때는 동이 틀 무렵이었다. 미간을 문지르며 일어난 그는 세수한 다음 새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 시간을 확인하고 구청으로 갔다. 구청 문 앞. 육태준은 멀지 않은 곳의 큰 나무 아래에 서 있는 하채원을 보았는데 그녀는 오늘따라 더 어두운 옷을 입고 있었다. 가랑비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처럼 유난히 말라보였다. 육태준은 자신에게 막 시집왔을 때의 하채원이 떠올랐다. 생기발랄하고 쾌활했던 그녀는 지금처럼 생기가 없고 수척하지 않았다. 하채원은 뒤늦게야 우산을 들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육태준을 알아봤다. 지난 3년 동안 육태준은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예전처럼 잘생기고 의기양양했으며 오히려 이전보다 더 성숙하고 세련됐다. 비록 3년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지만 하채원은 자신의 일생을 다 흘러보낸 것 같았다. 육태준은 하채원의 앞으로 다가와 사과를 기다리는 듯 쌀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소란을 피웠으니 충분했어.’ 하지만 하채원의 말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출근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해요.” 육태준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점점 더 쌀쌀하게 변했다. “후회하지 마.” 말을 뱉은 육태준은 성큼성큼 구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채원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쓰렸다. ‘후회할까?’ 누구도 이 문제의 대답을 알 수 없다. 이혼 서류를 제출하는 곳에서 구청 직원이 이혼을 결심했냐고 다시 물을 때 하채원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하채원의 단호한 눈빛을 보며 육태준은 시선을 돌렸다. 이혼 절차를 마쳤지만 한 달간의 냉정 기간이 있어서 다시 와야 했다. 만약 한 달 후 오지 않으면 이번의 이혼 신청은 무효로 된다. 구청을 나온 후 하채원은 차분한 눈길로 육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달 후에 다시 봐요. 안녕히 가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 택시를 타고 떠났다. 육태준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택시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마음이 답답해졌는데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해탈이겠지?’ 더는 그녀와 얽힐 필요가 없고 또 난청 아내가 있다고 다른 사람에게 놀림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 택시에 앉은 하채원은 차창에 기대어 앉아 빗물이 창문 위로 떨어지는 것을 넋 놓고바라보았다. 백미러를 통해 그녀의 귓가에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본 기사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가씨, 아가씨!” 몇 번을 외쳤지만 하채원이 대답하지 않자 기사는 급히 차를 세웠다.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왜 차를 세우지?’ 의문스러워 기사를 쳐다본 하채원은 그가 입을 벌름거리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이 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라고요? 들리지 않아요.” 기사는 그녀의 상황을 타이핑해서 알려줬다. 감각이 무뎌진 하채원이 손으로 만져서야 미지근한 촉감을 느끼게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왠지 습관이 된 것 같았다. “괜찮아요.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아요.” 비록 청각이 약하지만 처음에는 이렇게 피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된 것은 2년 전의 한 모임에서 육태준의 친구인 김도영이 그녀를 수영장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수영할 줄 모르는 하채영은 그때 고막이 팽창할 정도로 거의 죽을 뻔했다. 병원에 실려 가서 구급치료를 받고 목숨은 건졌지만 그후 이런 증상이 종종 발생했다. 거의 다 나았던 병인데 최근에는 웬일인지 또 도졌다... 기사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를 가장 가까운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하채원은 기사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후 혼자 병원에 갔는데 마침 오랫동안 그녀를 치료해준 주치의가 있었다. “장 선생님, 요즘 기억이 너무 안 좋아서 제가 뭘 하는지 가끔 잊어버려요” 하채원이 말했다. 오늘 아침 여관에서 일어난 하채원은 한참이 지나서야 오늘 육태준과 이혼한다는 걸 기억해냈다. 하채원의 진단 보고서를 본 의사는 수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하채원 씨, 심리 검사를 포함한 다른 검사도 받아보기를 권장합니다.” ‘심리...’ 하채원은 의사의 말대로 또 심리 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이 심각한 환자는 기억력이 어느 정도 떨어진다. 여관에 돌아오기 전 하채원은 노트와 펜을 사서 최근에 있었던 일을 하나씩 기록한 후 깨어나면 볼 수 있게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육태준과 이혼하는 일로 소란스러워졌다. 이날 밤 최미영은 전화를 여러 통 했지만 하채원은 듣지 못했는데 다음날 잠에서 깨서야 최미영이 보내온 문자를 보았다. [너 지금 어디야?] [네 딴 게 뭔데 함부로 이혼해? 이혼하더라도 육태준이 널 버렸어야 했어.] [넌 골칫덩어리일 뿐이야. 결혼했을 때는 네 아빠가 차 사고로 죽었어. 이제 이혼하면 하씨 가문을 망하게 할 예정이야?] 이런 문자에 익숙해진 하채원은 덤덤하게 답장을 보냈다. [엄마, 앞으로 남에게 기대지 말고 혼자 힘으로 살아요.] 곧 최미영의 문자가 왔다. [양심도 없는 배은망덕한 년! 널 낳지 말았어야 했어!] 하채원은 휴대전화를 밀쳐버리며 더는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한 달 후 육태준과 이혼 신고를 마치면 단현시를 떠나 새롭게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 후 며칠 동안 하채원의 몸은 날로 나빠졌다. 종종 청력을 잃었는데 어떤 때는 오래 있어야 회복이 되었고 기억도 점점 더 나빠졌다. 귀는 치료할 수 없어도 우울증은 치료할 수 있었다. 즐겁고 충실한 나날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 하채원은 인터넷에서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과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그들이 도움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하채원은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의미를 찾은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하채원은 평소처럼 옆에 일상을 기록한 공책을 본 후 보육원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집어 들자 최미영과 동생 하천우가 보낸 문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었는데 배다은이 보내온 문자까지 모두 읽지 않은 상태였다. 하채원은 하나씩 클릭했다. [최미영: 네 바람대로 하씨 가문이 망했어.] [하천우: 그래, 계속 숨어 있어! 난 너처럼 모질고 나약한 누나를 본 적이 없어.] [배다은: 하채원 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솔직히 하성 그룹은 태준 오빠가 맡아야 잘 살아남을 수 있어요.] [배다은: 하씨 가문에서 저를 후원해 준 것을 봐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도울 수 있는 건 다 도와드릴게요.]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는 하채원은 카톡을 끄다가 마침 핫 뉴스가 뜨는 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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