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문 쪽을 바라보았는데 순간 룸 안은 이상한 고요함이 흘렀다.
하채원은 한눈에 메인 자리에 앉은 육태준을 보았는데 맑은 눈빛이 전혀 취하지 않은 것 같았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배다은에게 속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채원을 본 육태준의 눈빛이 움찔했다.
육태준에게 배다은의 고백을 받아들이라고 제안했던 김도영을 포함한 사람들은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리에는 하채원이 오지 말았어야 했다.
“채원 씨, 오해하지 말아요. 김도영 씨가 농담한 거예요. 저랑 태준 오빠는 지금 그냥 친구일 뿐이에요.”
배다은이 먼저 입을 열어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
하채원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육태준이 귀찮은 듯 몸을 일으켰다.
“설명할 필요 없어.”
말을 마친 그는 곧장 하채원에게 다가와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술 취한 줄 알고 집에 데리러 왔어요.”
하채원의 솔직한 대답에 육태준은 차갑게 웃었다.
“내가 한 말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나 보군.”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단둘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되물었다.
“모두가 3년 전 육태준이 속았다는 것을 잊었다고 생각해서 그들의 기억을 끄집어내러 온 거야?”
하채원은 넋을 잃고 서 있었는데, 그녀의 모습에 육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괜히 존재감을 찾지 마. 네가 이러면 난 네가 더 미워져.”
말이 끝나자 그는 하채원을 두고 돌아섰다.
훤칠한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채원은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룸 안에 있던 부잣집 도련님들은 버려진 하채원을 보며 조금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는데 김도영은 더더욱 꺼리지 않고 슬픈 척하는 배다은에게 다가가 물었다.
“다은 씨, 너무 착한 거 아니에요? 이게 무슨 설명할 일이라고 그래요? 하채원 씨의 사기 결혼이 아니었다면 태준이는 다은 씨랑 결혼했을 것이고, 그러면 다은 씨가 다른 나라에 가서 그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하채원의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여전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똑똑히 들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육태준이 자신과 결혼하든 말든 그는 집안도 배경도 별 볼 일 없는 배다은과 결혼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배다은은 이를 잘 알고 있기에 결연히 이별을 결심하고 해외로 나간 것이다.
그런데 결국엔 왜 전부 그녀의 잘못이 된 걸까?
우산을 쓰고 프레스를 나설 때 하채원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한 줄기의 아름다운 그림자가 그녀의 곁에 왔는데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배다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정교한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밟으며 득의만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밤은 정말 추워요. 한밤중에 태준 씨를 찾아왔다가 비웃음을 샀는데 기분이 어때요?”
하채원은 말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배다은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난 하채원 씨가 참 불쌍해요. 지금까지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죠? 태준 오빠는 나와 함께 있을 때 직접 요리도 해 주고, 내가 아플 때 가장 먼저 내 곁으로 달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채원 씨, 태준 오빠가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어요? 예전에 나에게 자주 하던 말인데...”
하채원은 묵묵히 들으며 지난 3년 동안 육태준과 함께했던 날들을 되돌려보았다.
그는 한 번도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자신이 아플 때도 그는 관심 섞인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으니 사랑에 관해서는 더더욱 말한 적이 없다.
밤에 하채원은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이 12년 동안 좋아했던 남자도 다른 사람을 미친 듯이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포기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녀는 이튿날 아침까지 뜬눈으로 밤을 했다
집에 돌아온 육태준은 하채원을 보는 시선이 유난히 차가웠다.
“너에게 육씨 가문의 돈이 참 중요한가 봐? 육태준이라는 돈 버는 기계를 떠나는 건 어려운 일일 거야?”
하채원은 그가 오늘 왜 그러는지 어리둥절해 하며 자기도 모르게 설명했다.
“돈 달라고 할 생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녀는 줄곧 육태준이라는 이 사람에게만 신경 썼다.
육태준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럼 장모님이 오늘 아침에 회사에 가서 아이를 하나 달라고 부탁하던데 어떻게 된 거야?”
하채원은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육태준의 한기가 가득한 검은 눈동자를 보고 그가 어젯밤 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육태준은 더는 그녀와 실랑이 하는 것이 싫어 말 한마디 남기고 떠났다.
“하채원, 육씨 가문에 잘 있으려면, 그리고 하씨 가문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장모님에게 조용히 계시라고 해.”
...
하채원이 엄마를 찾아가기 전에 최미영이 스스로 찾아오더니 예전의 냉담함과는 달리 하채원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채원아, 태준이에게 아이를 하나 낳자고 해. 의학적 수단을 통해서라도 말이야.”
‘의학적 수단...’
하채원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가 그녀가 계속 말을 잇는 것을 들었다.
“배다은 씨가 엄마에게 말했어. 3년 동안 태준이가 널 건드린 적이 없다고 말이야.”
이 말에 한 가닥 남은 그녀의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채원은 육태준이 왜 이 일을 배다은에게 말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녀를 정말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그녀는 갑자기 후련함을 느꼈다.
“엄마, 그만 해요.”
최미영은 어리둥절해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지쳤어요. 육태준과 이혼하고 싶어요...”
짝!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미영은 하채원의 뺨을 내리치더니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손가락으로 하채원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혼을 언급하는 거야? 육씨 가문을 떠나면 너는 이혼녀 딱지가 붙을 건데 앞으로 결혼을 또 할 수 있겠어?”
하채원은 마치 감각이 없는 듯했다.
어려서부터 최미영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최미영은 유명한 무용가이지만 딸인 하채원이 난청이라는 사실이 평생의 응어리로 맺혔다.
그래서 모진 마음을 먹고 하채원을 유모에게 전적으로 맡겼고 학창시절에 이르러서야 하채원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했다.
예전에 하채원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가능한 한 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난청이라도 춤, 음악, 서화, 외국어 등 모든 것이 상위권에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해도 최미영에게는 여전히 좋은 딸이 아니었는데 최미영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건강하지 못한 것은 몸뿐만 아니라 가족애, 사랑도 있었다...
최미영이 떠난 후 하채원은 얼굴에 난 새빨간 손바닥 도장을 파운데이션으로 덮어준 뒤 혼자 묵묵히 짐을 챙겼다.
결혼한 지 3년이 넘었지만 그녀의 짐은 겨우 캐리어 하나에 담을 수 있는 양이었다.
짐을 싼 후 하채원은 용기를 내어 육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밤 시간 있어요? 태준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하채원은 표정이 어두진 채 이젠 문자도 답장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육태준이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새벽 12시에 그가 돌아왔다.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던 하채원은 앞으로 나가 그의 외투와 서류 가방을 받았다.
이런 행동들은 평범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앞으로 문자 함부로 보내지 마.”
육태준의 차가운 목소리는 이 순간의 평온함을 깨뜨렸다.
외투를 걸던 하채원은 손을 떨며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육태준은 그녀의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곧장 서재로 갔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집에 있는 대부분 시간을 서재에 머물렀다.
육태준의 인식 속에 청각장애인의 세계는 모든 것이 조용하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하채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서재에 도착해서도 예전과 다름없이 업무 얘기만 했다. 그 내용이 하성 그룹을 인수하는 내용인데도 말이다.
하채원은 평소대로 따뜻한 물 한 컵을 가져다주고는 육태준이 의기양양하게 부하 직원들과 아버지의 회사를 인수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는 것을 들으며 기분이 언짢았다.
동생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하성 그룹이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하성 그룹에 가장 빨리 손을 뻗은 사람이 자신의 남편일 줄은 몰랐다.
“태준 씨.”
나지막한 목소리가 육태준의 말을 끊었다.
육태준은 멍해 있다가 켕기는지 재빨리 온라인 전화를 끊고 노트북을 덮었다.
하채원은 이런 그의 행동을 못 본 척하고 들어와 따뜻한 물을 그의 앞에 놓았다.
“태준 씨, 물을 마시고 일찍 쉬어요.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하채원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은 육태준은 웬일인지 긴장된 마음이 좀 풀렸다.
‘듣지 못했을 거야.’
죄책감 때문인지 육태준은 떠나는 그녀를 불렀다.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무슨 일인데?”
그 말들은 하채원은 익숙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오늘 오전에 시간 있는지 묻고 싶었어요. 같이 가서 이혼 절차를 밟으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