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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서지훈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한구석에 어제 가지고 들어왔던 캐리어가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서지훈은 자연스레 강아영을 떠올렸다. 지난 3년간 해외에서 지냈던 그가 잠깐씩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강아영은 항상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한 미소로 그를 맞이하곤 했고 자기 몸 만한 커다란 캐리어를 굳이 혼자 낑낑대며 2층으로 옮기곤 했었다. 항상 그를 볼 때만큼은 기쁨과 쑥스러움이 가득했던 그녀인데 이번만큼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서지훈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러 개 쌓인 부재중 통화 중 대부분은 신지한에게서 온 것이었고 놀랍게도 강아영에게서 온 전화는 단 한 통도 없었다. 묘한 허전함을 느끼며 그는 신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뒤에야 받은 신지한이 대답했다. “형, 나 야근 중이야.” “아직도? 강아영이랑 같이 있어?” 서지훈이 의아한 듯 물었다. ‘급하게 터진 일이지만 지금까지 해결 못 할 건 아닐 텐데...’ “응. 아직도 공장에 있어.” “그깟 일을 아직도 끌어안고 있어? 강아영은 뭐 하는데?” 서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신지한이 강아영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한 공급업체의 프린팅 실수가 아니었어. 애초에 수출 자체를 막으려고 누군가 함정을 판 거야. 형수님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해성시의 전통 음식 중 하나인 말린 과일은 해마다 4000억 정도의 수출액을 자랑하는 산업이다. 그리고 그중 2000억가량의 주문을 하운그룹 산하의 무역회사가 맡게 되었다. 오늘이 바로 첫 회차 제품을 발송해야 하는 날인데 10만 개가 넘는 제품의 포장 상태가 불량이 나는 사고가 벌어졌다. 디지이너는 잠수를 타고 생산업체는 모르쇠인 상태라 급하게 다른 회사를 찾으려 해도 물량이 부족하다며 거절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서지훈이 공장에 도착하자 신지한이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형, 지금 공장 모든 직원들이 10만 개의 제품에 라벨을 붙이고 있어. 그 모습이 상상이나 가? 나 태어나서 이런 고생은 처음이야.” 꾹 다문 입술로 주위를 둘러보던 서지훈은 이제야 무균복을 벗고 있는 강아영을 발견했다. 낯처럼 환한 무균 작업실의 조명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꽤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깔끔한 얼굴 라인과 잡티 하나 없이 하얀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추운 새벽 날씨에 대충 회색 담요를 걸친 모습도 꽤 예뻤다. “형, 형수님이 가문 도움만 믿고 대표 자리에 온 건 아닌가 봐?” 신지한은 이때다 싶어 강아영의 칭찬을 한마디 건넸다. ‘형은 형수님에 대한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 잠시 후, 서지훈 앞을 지나던 강아영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밤새 일을 한 터라 대화를 나눌 힘도 없어서였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 줄은 몰랐어. 내 판단미스야. 미안해.” 그가 말했다. 서지훈이 사과를 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강아영이 흠칫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지한이한테서 들었어.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부족한 상품 라벨을 새로 프린팅하고 다시 붙이는 방법은 번잡했지만 유일한 해결 방법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위기에 당황하지 않고 모든 걸 안배한 것만 봐도 침착하고 지혜로운 성격임을 엿볼 수 있었다. 서지훈의 눈빛에서 차가운 혐오가 아닌 처음으로 칭찬을 느낀 강아영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3년간 이렇게 긍정적인 감정을 내비친 게 이혼을 결심한 지금이라는 현실이 씁쓸했다. 괜히 시선을 돌린 강아영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높은 연봉 받고 놀고 먹을 순 없잖아요.”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을 이어갔다. 새벽 바람이 불며 강아영의 머리카락을 스치자 하얗고 가는 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담요 속으로 몸을 숨기는 그녀를 향해 서지훈이 말했다. “내가 너에 대해 잘 모르는 건 맞지만 어머니 아버지는 널 진심으로 좋아하셔. 그만큼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난 이미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하기로 약속했고 그 약속 지키고 싶어. 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오빠한테 말해. 웬만한 건 다 도와줄 테니까.” 하필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선 서지훈에게서 그 여자의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욱신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지만 강아영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축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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