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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서우야.” 임예지는 끊임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안돼. 그럴 순 없어.” “서우야, 너도 디자인 업계의 룰을 잘 알잖아. 내가 만약 인정하면... 이 일로 커리어가 전부 망할 거야.” 임서우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언니가 바로 고치지 않으면 난...” “너 브레인 들어가고 싶다고 했지?” 임예지는 눈물을 쓱 닦았다. “이 일은 나한테 맡겨.” “하지만...” 임서우는 카피이스트 신분으로 그 회사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서우야.” 임예지는 후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해 너랑 하성의 일 때문에 난 아예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됐어. 그래서 그토록 큰 실수를 범한 거야.” 그녀는 임서우를 빤히 쳐다봤다. “이번 한 번만 나 용서해주면 안 돼? 너 브레인 들어가거든 무조건 실력 발휘 잘할 거야. 난 그럴 거라 믿어.” 임서우는 어느덧 할 말을 잃었다. 모든 게 그해 그 일로 시작되었으니 임예지를 용서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그럼 브레인 쪽은 언니한테 잘 부탁할게.” 임예지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말고 나한테 맡겨. 넌 회사 출근일만 기다리면 돼.” 임서우가 떠난 후 임예지는 곧바로 한은실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림에 관한 건 다 해결했어요.] 그녀의 카톡 닉네임은 ‘착한 예지’이다. 한은실이 곧바로 답장했다. [역시 우리 예지가 해낼 줄 알았어. 예지 최고.] 그녀의 닉네임은 ‘한’이다. 임서우는 잔뜩 풀이 죽은 채 김은아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됐어? 임예지가 뭐래?” 김은아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임서우는 소파에 털썩 앉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했어.” “뭐?” 김은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진짜 걔야? 어쩐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더라니.” “이 여자가 정말... 혼나고 싶어 애를 쓰네 아주!” 그녀는 임서우가 기분이 가라앉은 걸 보더니 옆으로 다가갔다. “서우야, 그럼 이젠 어떡할 셈이래? 너한테 어떻게 보상해줄 건데?” 임서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잠깐 정신이 나갔었대. 인제 와서 해명하면 모든 걸 망친대...” 그녀는 속절없이 김은아를 쳐다봤다. “그래도 나 브레인 패션 디자인회사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 “도와주긴 개뿔! 그 여자는 대체 왜 그렇게 뻔뻔스러운 거야?” 김은아는 치가 떨려 이를 박박 갈았다. 임서우는 분명 제 실력으로 브레인의 최고급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데 지금은 누군가의 인맥으로 카피이스트라는 누명을 무릅쓴 채 회사에 들어가는 꼴이 됐다. “이 여자 양심이 남아있다면 너 회사에서 서러움 당하지 않게 지켜줘야 한다고!” 둘은 소파에 앉아 한참 한탄하다가 임서우가 먼저 생각을 다잡았다. “됐어. 이번 일은 이만 넘길래. 브레인에 들어가면 꼭 잘해볼 거야. 거기 있는 사람들... 특히 이연아 씨한테 본때를 보여주겠어.” “그래.” 김은아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야. 그럼 우리 함께 파티나 할까?” “좋아!” 두 사람은 결국 외식하지 않고 맥주를 사서 조촐하게 집에서 먹었다. 임서우는 마음이 심란했다. 한편으로는 새 출발을 할 수 있어서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새로운 삶에 더는 강하성이 없다는 게 슬펐다. 그녀는 어쩌다 보니 술을 많이 마셨고 김은아를 부둥켜안은 채 울다가 또 웃었다. “은아야, 나 월급 타거든 꼭 거하게 한턱낼게. 아니, 세 턱 낼게!” “그래, 약속.” “은아야, 나 곧 이혼할 거야. 이젠 하성 씨랑 완전히 남남이야.” “그 사람 잊어. 네가 너무 힘들어 보여. 진짜 너무너무 지쳐 보여.” 김은아는 임서우가 수년 동안 강하성을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또한 그녀가 이 결혼 생활에서 얼마나 비천했는지도 너무 잘 안다. 방관자인 그녀는 항상 본인에게 경고했다. 절대 제2의 임서우가 되지 않겠다고 말이다. “잊어? 그래, 잊어야지. 진작 내려놨어야지. 하지만...” “흑흑... 은아야, 나 진짜 너무 힘들어. 왜 이렇게 힘든 거야? 대체 왜?” ... 사흘 뒤 임서우는 드디어 브레인 패션 디자인회사에 입사했다. 그녀를 접대한 사람은 이연아였다. “임예지 씨가 서우 씨 사촌 언니라고요?” 이연아는 만나자마자 야유 조로 쏘아붙이며 거만한 눈길로 그녀를 째려봤다. 카피이스트를 본 적은 있지만 제 가족에게까지 손을 대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가장 어이없는 것은 들통났음에도 사촌 언니한테 부탁해 이 회사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진짜 파렴치함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네.” 임서우는 머리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연아가 피식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귀청이 째지도록 크게 들렸다. 둘은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이연아는 곧이어 임서우를 데리고 패션 디자이너 작업실로 들어가더니 구석진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가서 앉아요.” 역시 국내 최고답게 하드웨어 기기들이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사무실은 널찍하고 화사하며 커다란 통유리창 밖으로 즐비한 고층 건물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한가운데 있는 네 개의 디자이너 작업대가 유난히 돋보였다. 넓은 공간에 컴퓨터, 태블릿, 화판, 그리고 각종 그림 공구까지 완벽하게 갖춰졌다. 한편 구석진 자리에는 컴퓨터 한 대만 달랑 놓여 있어 초라한 풍경이 사무실 분위기와 전혀 안 어울렸다. 임서우는 미간을 구기고 네 개의 작업대를 훑어보았는데 그중 하나는 사용자가 없었다. 그녀는 곧장 그곳을 가리켰다. 하지만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이연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거긴 주인 있어요. 곧 올 거예요.” 그녀는 심지어 임서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지도 않고 자리를 홱 떠났다. 임서우는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용기 내어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입사원 임서우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아 네, 그쪽이 바로 임 팀장님 사촌 동생이었군요!” 주도경 디자이너가 가식적인 미소를 날리며 그녀에게 응했다. 남은 두 명의 디자이너도 임서우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묵묵히 본인 업무에 전념했다. 임서우는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임예지가 팀장직을 따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그 몇 개의 그림들로 팀장직에 오른 걸까? 그뿐만이 아니겠지.’ 오전 내내 아무도 임서우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투명인간 같았다. 점심시간, 임예지가 카톡을 보냈다. [서우야, 입사 순조롭게 잘했어? 내가 쭉 바빠서 그분들더러 너 제대로 반겨주라고 말했는데.] [나름 잘하고 있어.] [다행이네. 저녁에 하성이 돌아와. 다 함께 너 입사 파티 해줄까 하는데.] [괜찮아.] 임예지는 더는 답장이 없었다. 임서우는 휴대폰을 다시 넣었다. 강하성이 돌아온다고, 그럼 두 사람의 이혼 수속도 곧 마무리될 듯싶다. 그녀는 손을 꽉 움켜쥔 제 모습에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뭐가 그리 괴로운 걸까? 그녀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저녁에 퇴근하고 건물 밖으로 나온 임서우는 길옆에 서 있는 강하성과 임예지를 발견했다. 두 사람이 너무 튀다 보니 지나가던 동료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임예지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녀와 인사했다. “임 팀장님, 남자친구분이세요? 너무 잘생기셨어요.” “팀장님 너무 행복하시겠어요. 남자친구분이 퇴근도 마중 나오시고요. 부럽네요 정말.” “팀장님 남자친구분 너무 잘생기셨어요. 혹시 연예인이세요?” 임예지는 웃으며 그들과 작별할 뿐 강하성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이 관계를 거의 묵인한 거나 다름없었다. 임서우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돌아서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지금은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 강하성은 이제 곧 도망치려는 그녀를 보더니 옆에 있는 임예지를 툭툭 찔렀다. “네가 찾는 사람 저기 있어. 난 먼저 차에 가서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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